원/달러 환율이 3개월 만에 장중 1530원대로 재진입하며 원화 약세가 확대되고 있다. 올해 들어 1500원대 종가를 기록한 날도 총 25거래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500원대 종가 기록일(12거래일)의 두 배를 넘었다.
중동 전쟁 격화와 미국 경제지표 호조가 달러 강세를 자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원화 절하 폭은 다른 주요 통화보다 두드러진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 국제유가 급등, 미국의 추가 관세 리스크, 대미 투자 확대가 동시에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외국인 주식 자금 이탈이다. 외국인은 4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약 7조원을 순매도하며 19거래일 연속 매도세를 이어갔다. 올해 들어 외국인의 코스피 순매도 규모는 약 117조원에 달한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진 것이다.
외환당국도 외국인의 주식 매도세가 원/달러 환율을 높이고 있다고 본다. 국내 주가 급등으로 해외 펀드 내 한국 주식과 반도체 업종 비중이 커지자 외국인 투자자가 일시적 비중 조정(리밸런싱)과 차익 실현을 하면서 변동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외국인의 매도세는 외환시장에서 실제 달러 수요로 반영된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원화는 국제유가 급등 영향으로 달러 대비 1.8% 절하돼 주요 통화 가운데 가장 약세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도 1.4% 추가 하락했다. 중동전쟁 발발 이후 누적 하락폭도 5.8%로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크다.
전규연 하나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지정학적 위험 확대와 미국 경제지표 호조를 감안하더라도 원화 약세 폭은 여타 통화 대비 과도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국제유가 상승도 원화에 불리하다. 한국은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아 유가가 오르면 수입 결제용 달러 수요가 커진다. 미국과 이란 간 군사 충돌이 격화되면서 호르무즈 해협 통항 차질 우려가 커졌고, 이는 유가 상승과 안전자산 선호를 동시에 자극했다. 이날 국제유가는 배럴당 90달러대 후반으로 뛰고 달러인덱스도 사흘 연속 상승해 99.5선을 넘었다.
여기에 미국의 추가 관세 리스크까지 겹쳤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에 12.5%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아직 최종 확정된 조치는 아니지만, 수출기업의 채산성과 한국 경상수지 전망에 대한 우려를 키울 수 있다.
대미 직접투자 확대도 환율 하락을 제한하는 요인 중 하나다. 반도체·배터리 기업들이 미국 산업정책에 맞춰 현지 투자를 늘리면서 국내로 들어와야 할 달러 공급 유인이 줄어들고 있다. 기업들이 미국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달러 수요를 늘리는 점도 원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만 원화 약세가 계속 일방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은 역대 최대 수준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가능성으로 한·미 금리차 역전 폭도 줄어들 수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역시 "과도한 쏠림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향후 환율의 향방은 외국인 주식 자금 흐름과 국제유가가 가를 것으로 보인다. 전 이코노미스트는 "환율이 하락 추세로 전환하려면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와 외국인 국내 주식 자금 유입이 선행돼야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