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스펙트럼' K-제조업, 초격차 안착 위한 생존 방정식

세종=조규희 기자
2026.06.19 07:45

[Made in Korea가 만드는 글로벌 미래]2-⑧

[편집자주] 반도체·방산·조선·배터리·변압기까지, 한국 제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특정 분야에 치우친 것과 달리, 한국은 첨단 기술 중심의 '풀 스펙트럼' 포트폴리오로 공급망 재편기에 다양한 산업의 핵심축으로 떠올랐다. 다만 중국의 추격과 대외 불확실성이라는 변수 앞에서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축으로 부상한 한국 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을 짚어본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13일 CNN 마켓플레이스 아시아가 현대자동차그룹이 싱가포르에 설립한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를 방문해 로봇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초자동화 생산 시스템과 사람 중심의 유연한 제조 환경을 미래 공장의 모델로 소개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은 HMGICS 내부 모습.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8.19/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대한민국 제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과거 선진국들이 부가가치가 높은 금융·설계에 집중하며 제조 기반을 상실하거나 특정 첨단 산업에 치우친 포트폴리오로 제조업 공백을 겪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반도체·배터리 같은 미세 첨단 기술부터 방산·조선·초고압 변압기 등 거대 중공업 인프라까지 모두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풀 스펙트럼(Full-Spectrum)' 제조 역량을 입증해냈다.

한국이 절정의 기량을 뽐내면서 글로벌 경쟁력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K-제조업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통상 블록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유럽의 핵심원자재법(CRMA) 등 보호주의 장벽, 범용 제품을 넘어 첨단 영역까지 치고 올라온 중국의 추격은 한국 제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불확실성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부상한 한국 제조업이 이같은 파고를 넘어 독보적인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존 전략이 필요할까.

◇ 시장을 지배하는 룰 세터…모듈형 신통상협정 필요

제조업 초격차의 완성은 결국 '시장의 규칙'을 누가 지배하느냐에 달려 있다.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정한 기술이 세계의 표준이 되는 '룰 세터'로 도약하게 되면 중국 등 경쟁국가의 추격을 손쉽게 뿌리칠 수 있다.

특히 AI(인공지능) 자율제조 시스템의 데이터 호환 표준, 차세대 친환경 선박의 핵심 기자재 규격, 고부가가치 초고압 변압기와 스마트 그리드의 전력 송배전 표준 등은 향후 글로벌 시장의 패권을 좌우할 격전지다. 정부와 민간 기업이 원팀이 되어 글로벌 표준화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한국형 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안착시키는 전방위적 '표준 통상'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K-제조업이 글로벌 공급망의 독보적인 '닻(Anchor)' 역할을 굳히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패러다임 역시 보다 과감하고 정교해져야 한다. 우선 미·중 갈등 격화와 경제 블록화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할 '모듈형 신통상협정' 체결과 공급망 다변화가 시급하다.

다자간 무역(WTO) 체제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이제는 핵심 원자재 보유국과 주요 시장별로 맞춤형 혜택을 조율하고 접근하는 모듈형 협정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해야 한다. 리튬·흑연·코발트 등 배터리 핵심 원자재의 특정국 의존도가 여전히 70%에서 90%를 상회하는 취약한 구조를 깨지 못하면 '메이드인코리아(Made in Korea)'의 지속 가능성은 떨어진다.

중국 등 경쟁국의 파격적인 보조금 공세에 대응해 첨단 전략산업,고부가 중공업에 대한 세제 혜택과 재정 지원 구조도 원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 미국의 IRA나 유럽의 CRMA는 세제 혜택을 넘어 사실상 천문학적인 재정 보조금과 생산량에 비례해 현금을 쥐어주는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를 무기로 글로벌 제조 기업들을 유인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세액공제 방식에 치우쳐 있다. 국회를 통과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통해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이 대·중견기업 기준 기존 15%에서 20%로, 중소기업은 25%에서 30%로 각각 5%포인트씩 상향됐고 R&D 세액공제 기한도 연장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세액공제는 어디까지나 이익이 발생해야 혜택을 보는 사후적 구조다. 초기 수조 원의 천문학적 자금이 투입되는 신규 팹(Fab) 건설기나 대외 악재로 일시적 적자에 직면한 기업에게는 당장의 유동성 확보에 한계가 명확하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이미 국회에 발의돼 있으나 세수 감소 우려 등으로 표류 중인 '직접환급' 또는 '양도가능 세액공제' 제도를 조속히 법제화해야 한다"며 "해외 경쟁국처럼 인프라 구축 비용을 직접 매칭 지원하는 대규모 현금 보조금 신설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중동발 나프타 대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일 오전 전남지역 나프타 가공(NCC)공장이 몰려있는 여수산단이 중국발 석유화학제품 물량공세와 이에따른 정부의 구조조정 압력, 최근 중동사태로 고충을 겪고 있다. 2026.04.01. /사진=뉴시스
◇ 기초소재 산업 체질 개선…사업재편과 세제혜택 엇박자 해소해야

철강 등 대한민국 제조업의 뿌리인 '범용 기초소재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도 필요하다. 현재 K-제조업의 허리 격인 소재·가공 산업은 중국발 물량 공세와 글로벌 환경 규제라는 전례 없는 구조적 위기 국면에 직면해 있다. 기초소재 산업의 붕괴는 단지 개별 업종의 위기로 끝나지 않는다. 철강과 석화 등 소재 생태계가 무너지면 방산,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전방 산업의 원가 상승과 공급망 교란으로 이어지는 도미노 타격이 불가피하다.

다행히 기업활력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되고 선제적 권고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범용 철강·석화 설비를 수소환원제철이나 모빌리티 소재 등 이종(異種) 신산업으로 전출시킬 제도적 기반은 마련됐다. 기활법상 승인 기업은 기본 3년에 더해 1회에 한해 2년까지 기간을 연장, 최대 5년에 이르는 장기적인 체질 개선 기간을 보장받는다.

정교한 정책 엇박자 해소도 절실하다. 업계 관계자는 "기활법상의 사업재편 실행 기간은 최대 5년까지 늘어날 수 있는 반면 이를 뒷받침하는 조세특례제한법상의 자산 매각 양도차익 법인세 과세이연 등 핵심 세제 혜택들은 여전히 1~2년 단위의 단기 일몰 기한에 묶여 있다"며 "기업이 장기 재편 계획을 신뢰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재정당국은 조특법상 세제 지원 시한을 기활법상의 승인 기간과 유기적으로 동기화하는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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