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뜨거운 평야를 거쳐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그리고 다시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로 향한 이가 있다.
거쳐간 현장은 달랐지만 그가 담당한 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지 농업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농업기술을 찾고, 그 기술이 현지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것.
농촌진흥청 코피아(KOPIA·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 네팔센터 송영주(65) 소장 이야기다.
송 소장은 전북도농업기술원, 국립농업과학원에서 오랫동안 연구와 정책을 경험한 뒤 해외 농업협력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KOPIA센터장을 거쳐 우즈베키스탄 KOPIA센터에서 벼 연구를 이어갔고, 올해 다시 네팔 KOPIA센터장에 임명됐다.
농진청은 지난 2월 작물육종 분야 전문가인 송 소장을 네팔 KOPIA센터장으로 선발하면서 기후적응성 벼 종자와 무병 씨감자 생산기술 개발을 주요 임무로 제시했다.
송 소장의 해외 농업기술 협력 경력에서 캄보디아는 특별한 곳이다.
3년간 캄보디아 농업현장을 누빈 그는 2024년 말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로부터 정부 훈장을 받았다. KOPIA 캄보디아센터가 농업기술 개발과 보급, 현지 연구자 역량 강화 등을 통해 캄보디아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당시 센터는 캄보디아 최초의 1대 잡종 옥수수 품종 'CHM01' 개발과 보급, 누에 품종 개발 등에서 성과를 냈다.
캄보디아가 메콩강 유역의 넓은 평야를 중심으로 벼와 카사바, 옥수수 등의 생산 확대가 가능한 곳이었다면 네팔은 전혀 다른 조건을 갖고 있다.
해발 60m 안팎의 테라이 평원에서 3000m 이상의 고산지대까지 고도와 기후가 크게 달랐다. 같은 작물조차 지역에 따라 파종·재배 시기와 적합 품종, 병해충, 물 관리가 달랐다.
송 소장은 "네팔 농업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큰 과제 역시 바로 그 다양성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11일 말했다.
그가 네팔에서 선택한 첫 번째 승부처는 첨단 스마트팜도, 대규모 시설농업도 아니다. 그가 주목한 작목은 네팔 국민들의 주식임에도 생산성이 낮은 벼와 감자다.
벼는 네팔 국민의 주식이자 식량안보와 직결된 작물이다. 감자 역시 산악지역부터 테라이까지 폭넓게 재배되며 농가소득을 책임지는 중요한 작물이다.
송 소장은 이 두 작물에서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로 '종자'를 주목했다.
아무리 좋은 품종을 연구기관이 만들어도 농민이 필요할 때 믿고 사용할 우량종자를 구하지 못한다면 연구성과는 논문이나 시험포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네팔 농촌에서는 젊은층의 해외 이주가 이어지면서 일손 부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송 소장은 "네팔 벼농사의 이앙 작업 가운데 약 95%가 아직도 손 이앙에 의존한다. 적기에 모를 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인건비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 소장이 벼에서 그리고 있는 해법은 그래서 '좋은 종자개발+기계화'다.
네팔의 봄벼와 우기벼 환경에 맞는 다수성·조생종을 선발해 우량종자를 생산·보급하고, 한국이 강점을 가진 상자육묘와 기계이앙 기술을 현지 여건에 맞게 접목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앙기 몇 대를 보내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기계이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균일한 묘를 만드는 상자육묘 기술부터 논을 고르게 만드는 정지작업, 물 관리, 이앙기 운전과 정비, 농기계를 대신 운전해주는 임작업 서비스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경험은 그의 판단에 힘을 더한다.
실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KOPIA와 함께 보급된 한국형 기계이앙 기술이 노동력을 크게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성과를 거뒀다. 농진청에 따르면 현지에서 한국산 농기계로 기계이앙을 실시한 결과, 노동력은 70% 줄고 생산성은 최대 52%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감자에서는 '무병 씨감자'가 핵심이다. 감자는 씨앗이 아니라 감자로 번식하는 영양번식 작물이다. 농가가 자체 생산한 씨감자를 여러 해 반복해 사용하면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쌓여 수확량과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KOPIA 네팔센터는 현지 농업연구청(NARC) 연구기관과 함께 조직배양 무병묘를 활용해 초기 세대 씨감자의 생산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검증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무병묘에서 시작해 씨감자 증식, 농가 보급까지 이어지는 자체 생산체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송 소장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기술이라고 해도 네팔에서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는 기술이전을 '복사'가 아닌 '번역'이라고 했다.
한국 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놓는 게 아니라 네팔의 기후와 토양, 농가 규모와 노동력, 농기계 보급 수준, 시장 상황에 맞게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 기술을 네팔에 적용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경험을 활용해 네팔 연구자와 농민이 함께 네팔의 기술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철학은 KOPIA가 다른 국제개발협력 사업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송 소장은 연구개발(R&D)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적응성 검정→농가 실증→교육·보급→현장 의견 재반영까지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설이나 장비를 지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설을 움직일 사람, 표준화된 기술, 종자를 생산할 농가조직까지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송 소장의 네팔 프로젝트가 성공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도 '장비 몇 대를 지원했느냐'가 아니다.
기계이앙을 실제로 이용한 농지가 얼마나 늘었는지, 농민들이 다음해에도 다시 그 기술을 이용하는지, 노동시간과 생산비가 얼마나 줄었는지, 농민 스스로 우량종자를 생산하고 주변 지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농업기술 협력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벼 산업과 기계화의 가능성을 들여다봤던 송 소장은 이제 네팔에서 또 다른 실험을 시작했다.
그가 네팔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의외로 단순하다. 한국 사람이 떠난 뒤에도 네팔 사람들이 스스로 좋은 종자를 만들고, 농기계를 운전하고, 그 기술을 옆 마을로 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송영주 네팔소장은 자신의 임기가 끝난 뒤 '네팔에 무엇을 남기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KOPIA가 네팔에 남겨야 할 것은 센터의 간판이나 장비가 아니라, 현장에서 계속 움직이는 종자와 사람, 그리고 시스템입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