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은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와는 결이 다른 얼굴을 꺼낸다. 덩치는 크지만 마음은 여린 청년으로 분해 무해한 매력을 완성한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주로 강인함과 카리스마를 보여왔던 그에게는 색다른 시도였다. 관객은 그를 보며 '덩치 큰 순둥이'라는 첫인상 뒤에 숨어 있는 조심스러운 눈빛과 소심한 동작을 발견하게 된다. 안보현은 이 지점을 의도적으로 살려 관객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무해한 청년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정말 저희 영화가 여름에 잘 어울리는 영화구나, 2년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싶었어요. 사실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보면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생기거든요. '내가 그때 느꼈던 현장의 온도가 관객에게도 전해질까?', '시간이 지나면 촬영 당시의 감정이 바래지진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요. 그런데 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어요. 낯선 환경에서도 정말 재밌게, 그리고 진심으로 임했던 현장이었거든요. 그만큼 제게도 특별한 기억이라서 이렇게 좋은 작품으로 나올 수 있게 돼 감사해요."
오는 13일 개봉하는 '악마가 이사왔다'는 새벽마다 악마로 깨어나는 여자 선지(임윤아)를 아르바이트로 감시하게 된 백수 청년 길구(안보현)의 예측불허 나날을 그리는 악마 들린 코미디물이다. 장르적으로는 판타지·코미디·스릴러 요소가 공존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관계 서사가 있다. 길구는 처음엔 단순히 알바생으로 선지를 감시하지만, 차츰 그를 돕고 지키려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대문짝 같은 체구와 달리 멍뭉미가 터지는 이 인물은, 외형적 대비에서 오는 웃음뿐 아니라 속마음의 순수함으로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길구는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서툰 사람인데, 그 안에는 굉장히 따뜻한 온기가 있어요. 저는 그 온기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했어요. 그래서 대사보다 눈빛이나 작은 동작에 더 신경을 썼죠. 관객이 '아, 이 사람은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이번 길구 역할을 "명확한 도전"이라 표현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강하고 선 굵은 캐릭터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기 톤부터 표정, 몸짓까지 세밀하게 힘을 빼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안보현이 보여준 인물들이 위기 속에서 먼저 나서는 유형이었다면, 길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눈치를 보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용기를 내는 인물이다.
"그간의 제 모습은 주로 강인하고 선이 굵은 캐릭터였죠. 그런데 길구는 완전히 달라요. 말 한마디, 시선 하나를 건네기 전에 먼저 숨을 고르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사람이죠. 촬영 전에는 '혹시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촬영하고 나니 길구로 보일 수 있는 서사가 잘 깔려 있어 좋았어요."
길구는 단순히 직업이 없는 백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잃은 인물이다. 안보현은 캐릭터의 공허함과 주저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꺼냈다. 운동만 하던 시절, 대인관계에서 느꼈던 낯섦과 거리감을 길구의 행동에 반영한 것이다.
"저도 운동만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나만 잘하면 된다고 채찍질하면서 살았죠. 그래서 사회에 나왔을 때 처음 부딪히는 환경이 낯설었어요. 길구가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걸 조심스러워하고, 대화를 피하는 모습이 제 과거와 많이 닮았더라고요."
액션 장면에서도 그는 길구다움을 유지하려 했다. 보통의 액션이라면 주인공이 멋지게 때리는 장면에 힘을 싣지만, 길구는 주로 맞는 입장이다. 맞는 동작조차 억지스럽지 않게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맞는 건 자신 있었어요. 때리는 사람이 더 빛난다고 생각하지만, 길구는 맞는 쪽이잖아요. 그래서 '맞을 때 어떻게 해야 길구처럼 보일까?에 대해 많이 고민했죠. 초반엔 이걸 코미디적으로 풀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현장에선 이미 길구가 되어 있어서 몸이 먼저 반응했어요."
그는 악역과 선역 연기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경험담을 전했다. 두 장르 모두 매력이 있지만, 특히 악역을 연기했을 때 느꼈던 강렬한 순간은 잊기 어렵다고 했다.
"악역과 선역은 정말 다른 즐거움이 있어요. 악역을 했을 때 희열을 느끼기보다는 정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인물을 만들었을 때 오는 묘한 성취감이 있죠. 예전에 드라마 촬영할 때 보조출연자분들이 화장실에서 제 얘기를 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쟤 정말 쓰레기 같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순간 움찔했는데, 곱씹어 보니 그게 최고의 칭찬이었죠. 나중에 그분이 누군지도 알게 됐는데(웃음),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그게 진짜 칭찬이야'라고 하셨어요. 그때 악역의 매력을 알았어요."
상대역 임윤아와의 호흡은 작품 완성도를 끌어올린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윤아가 실제로 털털해서 금방 친해졌다. 밤 선지에 가까울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고, 현장에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다. 특히 방방 장면에서는 길구가 아이처럼 즐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그건 윤아가 그만큼 잘 받아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길구라는 캐릭터에 끌린 이유는 단순한 웃음이나 설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 내면의 상처를 삭이며 살아가는,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과정은 배우로서 안보현에게도 울림이 있었다.
"길구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이에요. 결핍이 있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는 사람이죠. 저도 그런 편이라 공감했고, 그래서 길구가 선지를 만나 마음의 문을 열고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게 좋았어요. 저한테도 그런 순간이 있거든요. 아무도 몰랐던 내 마음을 누군가가 이해해 줄 때, 그게 사람을 변화시키더라고요."
배우로서 그는 끊임없이 도전을 원한다. 단순히 안전한 선택을 반복하는 대신, 매번 다른 얼굴과 결을 가진 인물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익숙함에 머무르기보다 낯선 장르와 성격의 캐릭터에 몸을 던지는 일에서 성장의 동력을 얻고, 그 변화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는 배우가 되고자 한다.
"잘하는 것만 하는 건 제 성향에도 맞지 않아요. 늘 새로운 장르, 다른 결의 인물을 만나는 게 제겐 자극이고 공부예요. 해보지 못한 게 많기 때문에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