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은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아마 1999년생인 김유정보다 나이가 많은 대한민국 전 국민이 한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김유정은 예쁘지 않은 적이 없었어.’ 그렇다. 2003년 크라운제과의 ‘크라운산도’ CF로 데뷔할 때부터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가 방영 중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유정은 항상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존재감이 남달랐다. 개인적으로 처음 김유정의 존재감을 인식한 건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인데, 동글동글 귀여운 어린 소녀가 납치당해 VCR 화면 안에서 우는데,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짧은 장면임에도 마음에 콱 박혔다.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해 개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박진아도 남다른 김유정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낸 작품이었다. 6세의 나이로 김수로와 환상의 ’티키타카’를 보여주는 야무진 연기력에 앙증맞은 외모가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거든. 그 이후로는 내로라하는 작품에서 역시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의 아역으로 김유정이 단골 출연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영화 ‘각설탕’의 임수정 아역과 ‘황진이’의 송혜교 아역부터 드라마 ‘일지매’ ‘동이’의 한효주 아역, ‘바람의 화원’의 문근영 아역, ‘선덕여왕’의 박예진 아역, 그리고 성인 배우들을 찜 쪄먹는 화제성으로 눈길을 끌었던 ‘해를 품은 달’의 한가인 아역 등등. 요컨대 김유정은 2000년대에 누구나 아는 명품 아역 배우였다.
이렇게만 열거하면 김유정이 시대별로 존재하는 연기 잘하는 아역 배우와 무엇이 다르랴 싶을 것이다. 곰곰이 짚어보면 김유정은 똑부러진 연기와 어릴 적 외모를 고스란히 유지한 ‘정변’의 성공 외에도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며 차세대 스타 및 톱배우의 길을 다져왔다. 대중이 김유정을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김유정 그 자체로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이 그 방증.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의 딸 은지가 그랬고,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으로 역대 최연소 구미호를 맡아 열연하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신드롬급 인기를 끌었던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를 지나 ‘구르미 그린 달빛’의 홍라온으로 성인이 되기 전인 10대 때부터 이미 로맨스 주인공의 자질을 입증한 것도 성인 배우로의 성공적 안착에 도움이 됐다.
미성년 딱지를 떼고 난 후 김유정은 완성형인 화사한 외모로 로맨스물을 소화해냈다.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로 윤균상과 호흡을 맞춘 것을 시작으로, ‘편의점 샛별이’로 지창욱과 케미를 선보이며 액션 연기까지 소화했고, ‘홍천기’로 타이틀롤을 맡아 안효섭과 애절한 사랑을 나누더니, ‘마이 데몬’에선 송강과 함께 극강의 치명적 비주얼 합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홀렸다. 아,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에서 변우석과 아련한 비주얼 합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또 김유정이 미모로 흥해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군림한 예쁜 배우들과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 싶을 수 있었다. ‘편의점 샛별이’ ‘홍천기’ ‘마이 데몬’ 등이 화제성과 별개로 시청률이 고만고만했다는 점도 아쉬운 지점이었고. 톱스타 혹은 실력파 배우로 보기엔 미세하게 한끗이 아쉽다고 생각하던 때, 김유정은 ‘친애하는 X’로 한 단계 도약 중이다. 김유정이 맡은 ‘친애하는 X’의 백아진은 누구나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화려한 외모로 배우가 되어 최상위로 올라서려고 하는 인물. 천사 같은 외모로 다가오지만, 실상은 인류의 약 4%에 해당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로, 주변의 누구든 자신을 위해 기꺼이 도구로 쓰는 데 스스럼이 없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김화연으로 악역 연기를 선보인 적 있지만, 백아진과는 겨룰 바가 못 된다. 3화에서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울 듯 웃던 광기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김유정이 아니니까.
팜므 파탈 김유정의 얼굴도 솔깃하다. ‘마이 데몬’에서 ‘에르메스를 입은 악마’ 같은 재벌 상속녀 도도희로 차갑고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 있지만,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어?”라며 남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백아진은 차원이 다르다. 8화에서 허인강(황인엽)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는 윤준서(김영대)에게 백아진이 토해내는 대사들은 또 어떻고. 어릴 적 욕조에 처박히던 자신을 구하지 못했던 윤준서를 매섭게 몰아세우다가도 다시금 “넌 날 항상 비난해도 난 널 비난하지 않을게”라며 준서의 마음을 멀어지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기술을 보여준다. 저런 얼굴에 저런 감정 연기에 저런 가스라이팅이라니, 내가 윤준서여도 도망갈 수 없을 것 같다. 반면 자신과 비슷한 삶의 상처를 안고 있는 김재오(김도훈)를 휘감을 때는 한없이 도도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으로 옴쭉달싹 못하게 만든다. 팜므 파탈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다면 ‘친애하는 X’의 백아진을 보면 된다.
고도로 깊어진 김유정의 감정 연기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시오패스지만, 허인강이 죽은 욕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는 백아진의 혼잣말과 그 텅 빈 눈빛은 얼마나 애절한가. 이 작품이 추후 오랜 시간 김유정의 인생작으로 꼽힐 것이라 보는 이유다.
20년 넘게 김유정의 연기를, 그 존재감을 보고 있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친애하는 유정 씨가 이 작품을 발판 삼아 백아진처럼 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바란다. 누군가의 조력과 파멸에 기대어 오른 백아진과 달리 김유정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힘으로 차근차근 올라섰으니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