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 한 자락이 있을 것이다. 헤어진 이유는 분명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유는 바래고 추억은 진해진다. 그러다 우연히 과거에 사랑했던 그 사람을 마주한다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만약에 그때 그랬다면’ ‘그래서 헤어지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영화 ‘만약에 우리’는 그런 우리의 보편적인 감정선을 묵직하게 건드리는 로맨스물이다.
2024년 여름 호치민.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은 10년 만에 다시 조우하며 서로를 알아본다. 태풍으로 인한 기상 악화로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하고, 설상가상 호텔도 만실이 되면서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과연 이들 사이엔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을까. 그렇게 영화는 2008년 여름, 고흥으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나란히 앉으며 인연을 맺게 되는 두 사람의 과거를 되짚어 간다.
2008년의 은호와 정원은 가진 것은 없지만 꿈만은 창창한 20대 청춘. 은호는 자신의 게임을 개발해 100억을 벌겠다는 꿈을 갖고 있고, 보육원에서 자란 정원은 여건에 맞춰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집을 짓길 갈망하며 건축사를 꿈꾸고 있다. 은호는 정원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서서히 친구로 다가가고, 결국 연인이 된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파릇파릇한 연인이 되어 알콩달콩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내 팍팍한 현실에 지쳐간다. 놀랍지 않다. 모든 사랑은 변한다. 게다가 20대는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도전이 집중되는 격변의 시기다.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먹고 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서울에 한 뼘의 햇볕도 쉽게 허락받지 못하는 가난한 청춘에겐,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이 녹록하지 않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던가. 꼭 가난이 아니어도, 각자 현실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꿈도 쫓아야 하니 사랑은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넌 정말 잘 될 거야”라고 응원을 던져도, 오히려 그 응원에 짜증을 내게 된다.
은호와 정원의 절절했던 사랑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맞아, 나도 그랬어’ 하며 수긍하지만, 그 변해가는 과정은 못내 아프다. 한 뼘의 햇볕을 아쉬워하던 정원에게 옥탑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며 “너 다 가져”라고 말했던 은호가, 연애의 종말 즈음 반지하 방에서 햇볕을 보고 있는 정원 앞에서 커튼을 확 쳐버리게 되는 과정. 조금이라도 더울까 선풍기 방향을 세심하게 정원에게 맞춰주던 은호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선풍기를 고정시키게 되는 그런 과정. 작고 사소한 것들이 쌓여 그들은 그렇게 이별한다. 어쩌면 내가 너를 놓친 걸 수도, 어쩌면 내가 너를 놓은 걸 수도.
‘만약에 우리’는 과거의 연인이 우연히 재회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쌓아가는데, 이때 눈에 띄는 건 현재의 시점은 흑백으로, 과거는 컬러로 연출한 것. 이는 이 영화의 원작인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도 주요한 설정인데, 흑백과 컬러가 변주되어 이들의 서사에 이입할수록 이 설정이 얼마나 섬세한 감정 서사와 연결되는지 감탄하게 된다. 영화의 말미, 홀로 남은 인물이 컬러를 되찾고 비로소 이들의 사랑이 완전한 안녕을 했음을 느낄 때의 아련함은 또 어떻고. 뜨거웠던 사랑은 끝났지만, 미진했던 이별을 성숙하게 끝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만약에 우리’의 감정선을 완성시키는 건 구교환과 문가영의 세밀한 연기에 있다. 구교환의 팔색조 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 ‘D.P.’의 한호열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방구뽕, 혹은 ‘탈주’의 리현상 같은 독특한 인물이 새록한지라 본격 대중 로맨스물에서의 구교환은 어떨지 살짝 의구심이 있었는데, 완벽한 기우다. 로맨스물의 남주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와장창 깨는 구교환 특유의 리듬감이 물씬한 로맨스 남주를 만끽할 수 있다. 홍합 껍데기를 와작와작 씹어 먹고, 술자리에서 탈춤을 추는 ‘이 동네 섹시가이’가 “내가 널 놓쳤어” 하며 오열하기까지 보여주는 다양한 변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문가영은 이미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현실에 휘둘리는 사랑의 감정선을 훌륭하게 선보인 바 있는데, ‘만약에 우리’에선 불안정한 20대부터 단단해진 3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기로 시선을 붙든다. 버스 안에서 은호의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터트리는 오열 신의 얼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또한 영화는 2000년대 말과 2010년대 초반의 연애 과정을 주로 다루며 흔히 말하는 ‘싸이월드 감성’을 디테일하게 소환한다. 특히 주요 BGM으로 흐르는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클래식’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건축학개론’의 ‘기억의 습작’처럼 ‘만약에 우리’의 대표 OST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엔딩 크레디트에서도 다시 나오며 그 시절의 여운을 곱씹게 만드니 끝까지 감상을 권한다. 이외에도 팀의 히트곡 ‘사랑합니다’와 적재의 신곡 ‘By Your Side’ 등이 어우러지면서 OST 듣는 재미도 클 것으로 보인다.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했던 김도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만약에 우리’는 2025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개봉한다. 지나간 사랑과 함께 흘러간 2025년에 안녕을 고하는데 좋은 선택이 되어줄 것. 러닝타임 115분, 15세 관람가.
정수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