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엄한 군주였다가 재벌 2세였던 이준호가 이번에는 히어로가 됐다. 그것도 돈 앞에서 좌절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히어로다. 지난달 종영한 ‘태풍상사’에 이어 또다시 자본과 현실의 벽 앞에 선 청년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선택 방향에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긴다. 그런 질문에 답하듯 공개된 넷플릭스 신작 ‘캐셔로’(극본 이제인, 연출 이창민)는 히어로물의 외피를 입었지만, 그 속살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캐셔로’는 돈을 의미하는 캐시(cash)와 히어로(hero)를 합성한 말. 평범한 공무원인 주인공 상웅(이준호)에게 돈을 쥐면 힘이 나는 초능력이 생기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상웅은 경제관념 투철한 여자친구 민숙(김혜준)과 결혼하기 위해 단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처지라 그 초능력이 난감하기만 하다.
결혼자금과 초능력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히어로라니. 짠내가 폴폴 나는 동시에 뼈아프다. ‘캐셔로’는 초능력이 생긴 평범한 남자가 세상을 구한다는 익숙한 공식 위에 아주 노골적인 조건을 하나 붙인 것이다. 능력을 펼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 돈이 많을수록 더 강해지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를 히어로 장르의 문법으로 번역한 셈이다.
극 초반 상웅은 몇 차례나 불의를 외면하며 자기합리화한다. “돈이 아주 많았으면 아주 착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내집 마련에 성공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독백들은 특이한 초능력의 소유자만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두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옮겨온 문장들이란 걸. 이후에도 상웅의 독백은 남다른 초능력 히어로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현실의 누구라도 가질만한 고민을 담는다. ‘캐셔로’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이다. ‘우리는 정말 돈이 없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걸까.’
이처럼 묵직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드라마의 결은 의외로 가볍다. 전개는 빠르고 선악 구도는 놀랄 만큼 단순하다. 불과 몇 개월 전 ‘폭군의 셰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채민과 강한나가 나란히 악역으로 등장해 눈길을 끌지만, 서사도 없이 기능적으로 소비된다. 요즘 드라마에서 진짜 보기 드문 개성 없는 악당이다. 다른 조연들 역시 예측 가능한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반전이 없는 게 ‘캐셔로’의 큰 특징이자 한계다.
그중에서도 제일 이질적인 존재는 여자친구 민숙이다. 대문자 T 성향의 현실주의자.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이상보다 생존을 우선하는 인물이 끝까지 주인공의 곁을 지킨다는 설정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현실이라면 초능력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가장 먼저 등을 돌렸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캐릭터는 반전 아닌 반전이다.
그럼에도 ‘캐셔로’의 단순함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를 끝까지 가볍게 끌고 간,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캐셔로’는 자본주의와 책임이라는 심오한 문제에 매몰돼 가슴 복잡하게 하기보다는, 쉽고 편안하게 접근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툭 건드리는 쪽을 택했다. 현재 국내외에서 전해지는 ‘캐셔로’ 흥행 소식은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사실 ‘캐셔로’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도 단순하다. 돈이 있어서 힘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으면 힘을 쓸 수 있는 것. 이 뻔한 서사를 이준호가 힘있게 끌고 간다. ‘옷소매 붉은 끝동’(2021)와 ‘킹더랜드’(2023)로 흥행킹이자 믿고 보는 배우로 등극한 이준호의 힘이 다시 한번 발휘됐다.
이미 ‘태풍상사’에서 IMF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청년 사업가를 연기한 그는 또 한 번 신뢰감 있는 얼굴로 이 시대 청년들의 경제 현실을 화두로 던진다. 게다가 이준호가 과장되지 않게 힘을 빼고 펼친 연기는 진짜 현실에 맞닿아있어서 생활밀착형 히어로로 제격이다. 자칫 찌질해질 수 있는 이야기는 이준호의 얼굴로 그리기에 짠내가 난다고 하면서도 훈훈하게 미소 짓게 된다.
결국 ‘캐셔로’를 관통하는 힘이자 개연성은 이준호에서 비롯된다. 단순하고 뻔한 ‘캐셔로’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이준호의 힘이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짜 초능력인지도 모른다. 군주부터 재벌2세, 사업가, 그리고 히어로까지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넘나들며 4연속 흥행타를 치는 이준호의 성과는 더더욱 그의 능력치를 다시 보게 한다.
조성경(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