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정신이란 무엇일까. 국내 힙합 1세대의 대표 주자 가리온의 말대로 "표현의 자유나 상상력들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장르의 뿌리에 근거해 저항과 해방으로도 볼 수 있다. 정답은 없다. 다만 많은 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공통의 결은 있다. 유불리를 따지기보다 자신의 신념대로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태도다.
지난 2024년 탁재훈 유튜브에 출연한 래퍼 정상수가 '국힙 원탑'을 묻는 질문에 "민희진"이라고 답해 화제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상수는 "랩을 굉장히 잘해야만 힙합이 아니고 날아오는 화살에 굴하지 않고 본인의 태도를, 마음에 있는 얘기를 시원하게 얘기하는 게 그게 힙합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민희진은 어도어와의 대립에서 거침없는 언어와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였고, 당시엔 많은 이가 그 태도를 '힙합적'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그 결을 더 또렷하게 보여준 인물이 있다. 티빙 오리지널 '쇼미더머니12: 야차의 세계'(이하 '야차의 세계') 참가자 래퍼 언텔이다.
'야차의 세계'는 계산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비트 선택부터 누구와 붙고 목걸이를 몇 개 걸지까지 모든 선택이 생존과 직결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판을 읽고, 확률을 따지고, 위험을 미룬다. 전략적으로 보면 그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언텔은 그 합리를 거의 따르지 않는다. 그는 벌스를 아끼지 않았고, 판을 재지 않았다. 가능한 한 많이 랩했고, 가능한 한 자주 무대에 섰다. 1회부터 4회까지 언텔은 가장 많은 랩을 한 참가자였다. 가장 많은 벌스를 소진했고, 그래서 가장 많은 장면을 남겼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배틀은 더뎌졌고, 참가자들은 점점 눈치 보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티면 '쇼미더머니12' 부활 티켓을 거머쥘 수 있어서다. 그렇게 판이 정체될 때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늘 언텔이었다. 제작진이 그를 "지하 전장의 최강자"라고 수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연쇄적인 배틀을 통해 프로그램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았다.
언텔은 '쇼미더머니12' 1차에서 탈락한 뒤 '야차의 세계' 1라운드부터 합류했다. 2차전까지 생존했고, 3차전 통과 문턱에서 멈췄다. 라운드마다 수많은 탈락자가 쏟아졌지만 언텔의 탈락만큼은 유독 큰 아쉬움과 충격을 남겼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배틀에서 "누구라도 자신과 1:1 배틀을 한다면 목걸이를 모두 걸겠다"고 말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재미와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장면이었다. YLN Foreign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목걸이 16개가 걸린 1:1 빅배틀이 성사됐다. 결과는 YLN Foreign 승리했고, 언텔은 모든 목걸이를 잃고 탈락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시선은 승자인 YLN Foreign이 아닌 언텔에게 쏠렸다.
심사석에 앉아 있던 가오가이는 언텔을 두고 "사실은 (배틀) 안 해도 됐다. 근데 강심장과 그 야수의 모습이 '야차의 세계'와 가장 어울리는 참가자였다"고 했고, 행주는 "진짜 무서운 놈이다. 대단하다"고 말했다. 퇴장 순간 심사위원들이 동시에 "안돼"를 외친 것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언텔의 태도를 리스펙트했기 때문이다. '야차의 세계' 애청자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탈락이 곧 퇴장을 의미하는 서바이벌에서 이렇게 큰 아쉬움을 남긴 퇴장은 흔치 않다. '야차의 세계'가 원하는 얼굴이 무엇인지, 한동안 희미해졌던 '멋있는 힙합 정신'이 무엇인지 언텔은 자신의 방식으로 증명했다.
언텔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도 담백하지만 상당히 멋스러운 답을 내놓고 떠났다.
"이걸 후회하는 사람도 있나요? 누군가한테 무대가 주어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하고 싶은 랩 다 하고 가서 후련해요. 내게 '야차의 세계'란 내가 하고 싶은 랩을 다 할 수 있게 만들어준 프로그램. 다른 참가자들이 좀 더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용기 내서 여러분의 몫을 가져가길 바랍니다."
이 말에는 패자의 변명이 없다. 미련도 없다. 오직 자부심만 남아 있다.
언텔은 확실히 제 몫을 챙겼다. 끝까지 살아남아 본편으로 부활하는 것보다 훨씬 값지고 빛나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구질구질하게 기회를 붙잡고 연명하기보다 주어진 판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고 떠나는 태도야말로 힙합다웠다.
그 선택은 전략적으로 보면 분명 손해였다. 벌스를 아끼고, 타이밍을 재고, 확률을 계산했다면 언텔은 더 오래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차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쾌감은 바로 그 손해를 감수하는 순간에서 나온다. 심사위원이 "안 해도 됐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야차답다'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텔은 목걸이를 모두 잃고 탈락했지만, 그 퇴장은 '야차의 세계'의 가장 또렷한 클라이맥스로 남았다. 그래서 힙합 커뮤니티에 떠도는 '언텔의 세계'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