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며 관객을 위로했다.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의 공연 취소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박정민이 보여준 품격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다만 결국 배우가 사과해야 사태가 마무리되는 현상은 시스템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0일이었다.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 측은 개연을 불과 5분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공연 취소를 통보했다. 현장에 있었던 관객들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초기에 명확한 취소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진 박정민의 연극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발길을 돌려야 겠다.
이후 제작사는 입장문을 통해 "일부 조명 기기의 갑작스러운 기술적 문제로 공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최종 점검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로 조명 기기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안전을 고려해 취소를 결정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성난 민심을 달랜 것은 제작 시스템이 아닌 배우 박정민이었다. 그는 11일 소속사 SNS를 통해 장문의 사과문을 게시했다. 박정민은 "미처 열리지 않은 극장 문을 등지고 발걸음을 돌리셨을 관객분들의 그 허탈함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며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내어주신 그 귀한 시간과 에너지, 소중한 마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적었다.
단순한 말뿐인 사과가 아니었다. 영화 '휴민트' 개봉에 맞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제작사와 협의해 오는 16일 추가 공연을 편성했다. 취소된 회차의 예매자들에게 동일한 좌석으로 관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한 번 훼손된 관객의 기분을 완벽히 되돌릴 순 없겠지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갖춘 셈이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정작 비판받아야 할 주체는 흐릿해지고, 사과의 최전선에 배우가 서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는 명백히 프로덕션의 기술적 결함과 미숙한 현장 대처에서 비롯됐다. 현장 후기에 따르면 관객들은 직원들의 대처 방식에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총대를 메고 대중 앞에 선 것은 결국 박정민이었다.
이는 비단 이번 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예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단지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화살을 대신 맞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최근 그룹 아이브의 장원영 역시 주최 측의 미흡한 준비로 포토월 행사에 늦었음에도 '지각 논란'이라는 오명 속에 해명해야 했다. 장원영의 사례는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박정민의 경우에는 피해자임이 명백하다.
물론 주연 배우가 작품을 대표해 도의적인 사과를 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제작사의 운영 미숙으로 발생한 사고마저 배우 개인의 호소력에 기대어 무마하려는 모양새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박정민의 진심 어린 사과는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그가 왜 사과를 해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를 지워서는 안된다.
한편, '라이프 오브 파이' 측은 조명 기기 정상화 이후 11일 공연부터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취소된 회차의 관객 중 추가 공연을 관람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결제 금액의 110%를 환불해 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