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가 일상 깊숙이 스며든 시대다. 처음엔 그저 신기한 기술에 불과했던 AI는 이제 업무부터 창작, 심지어 감정적인 대화까지 나누는 단계에 이르렀다. 얼마 전 중국에서는 인간의 표정과 감정까지 정교하게 모사하는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공개됐다.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기술혁명기를 맞이한 우리는 ‘AI와 함께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결국 기술은 '써먹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월간남친’은 이러한 기술적 상상력을 기가 막히게 응용한 작품이다. 작품 속 ‘월간남친’은 가상 남친 구독 콘텐츠다. 현실의 복잡하고 피곤한 연애 대신 내가 원하는 외모와 성격으로 맞춤 설정된 남친을 구독하는 가상 연애 서비스라니, 이 도파민에 푹 절여진 완벽한 콘텐츠를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극중 웹툰 PD ‘서미래’(지수) 역시 제작사에서 요청한 리뷰를 핑계 삼아 가상 남친과 달콤한 연애를 시작한다.
‘월간남친’에는 무려 900명의 남성이 존재한다. 오늘은 재벌 3세 ‘최시우’(이수혁), 내일은 동아리 선배 ‘서은호’(서강준)를 만나는 꿈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때로는 닭살 돋고 오글거리며, 현실이 아님을 각인시키는 유치한 연출도 존재한다. 하지만 맞춤형 연애 판타지의 중독성은 제법 상당하다. 시청자 역시 극 중 인물들처럼 이 뻔하지만 완벽한 연애에 묘하게 설레며 빠져들게 된다.
미래를 비롯한 웹툰 작가 ‘윤송’(공민정), 미래 친구 지연(하영) 등 ‘월간남친’의 구독자들은 이 가상 남친이 프로그래밍된 데이터이자 가짜라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이는 AI가 제공하는 감정적 교류가 비록 알고리즘에 따른 것일지라도, 누군가의 삶에는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생의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이 기계에게 위로받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월간남친’은 “현실이 중요하다”는 뉘앙스를 놓지 않으려 애쓴다. 가상 연애의 긍정적인 점을 그리다가도, 이따금 AI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현실 도피자처럼 묘사하며 선을 긋는다. 작품의 중심이 서미래와 박경남(서인국)의 현생 연애로 옮겨가면서, ‘월간남친’ 서비스는 뒷전으로 사라진다. 매력적인 ‘AI 가상 연애’라는 소재가 현실 로맨스를 위한 도구로 소비된 셈이다. 어쩌면 'AI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현명한 사용법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서미래 역시 양가적인 감상을 남긴다. 먼저 잘나가는 여성이라는 점이 좋다. 동종 장르가 주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톨이 스타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과 다른 지점이다. 미래는 외모도 출중하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으며,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조차 얼마든지 가상 연애에 빠질 수 있다는 설정이 이 작품을 마주하는데 거부감을 낮추고 공감대를 넓힌다.
허나 미레의 연애는 너무 수동적이다. 이는 미래뿐만 아니라 ‘월간남친’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세팅한 가상 남친이라면 얼마든지 당당한 연애를 주도할 수 있을 텐데, 미래는 현실 세계는 물론 가상 세계에서도 상대 남성이 깔아놓은 판에 끌려다니기 바쁘다. 내 마음대로 남친을 사귄다는 굉장히 주체적인 소재를 들고 나왔음에도, 주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구시대적 연애관이 답답한 뒷맛을 남긴다.
미래를 연기한 지수는 다시 한번 심판대에 오른다. 그간 작품마다 연기 논란을 남겼으니 이번에도 시청자들은 날 선 시선으로 지수를 바라볼 터다. 세계 최정상 걸그룹 출신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통과의례다. 매번 지적받았던 발음 문제는 극 초반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점차 안정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수는 완벽하게 유효한 캐스팅이다. 발음 등 연기 디테일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한국 시청자에게 주로 적용될 뿐, 해외 시청자들에겐 큰 장벽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블랙핑크’ 출신이라는 압도적인 인지도와, 다국어 더빙으로 소비되는 글로벌 시청 환경을 감안하면 매우 영리하고 파괴력 있는 선택이다.
여성 시청자들을 겨냥한 화려한 남성 출연진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무기다. 상대역인 서인국이 다소 답답한 캐릭터로 설정된 반면, 가상 남친인 이수혁과 서강준은 대놓고 페로몬을 뿌려댄다. 관 뚜껑에 못질해서 묻어뒀던 연애세포까지 살려낼 기세다. 비밀 요원 옹성우, 호랑이 의사 선배 이재욱, 지적인 매력의 훈남 판사 이현욱, 조선 시대 테마를 체험시켜 주는 김영대, 톱스타 박재범, 소방관 이상이 등 깜짝 등장하는 가상 남친들도 반갑다.
조연들의 활약도 극을 풍성하게 채운다. 공민정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히스테릭한 웹툰 작가를 완벽히 소화했고, 미래의 친구 ‘지연’을 연기한 하영은 유쾌한 매력을 뽐낸다. 유일하게 능동적으로 ‘월간남친’을 공략하는 캐릭터라 더욱 눈길이 간다. 또한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 NPC들을 연기한 유인나, 고규필, 김아영 역시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선사한다.
결론적으로 ‘월간남친’은 묵직하고 치밀한 서사를 기대하는 시청자보다는, 트렌디하고 가벼운 로맨스를 좇는 젊은 세대를 명확히 타깃으로 삼은 작품이다. 애당초 가상 남친과 만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면, 충분히 도파민 터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월간남친’이다.
권구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