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시련을 겪더라도 단숨에 각성해야 하고, 답답한 고구마 전개 뒤에는 반드시 통쾌한 사이다 복수가 뒤따라야 환영받는다. 이런 매끈한 흥행 공식의 잣대로 보자면 배우 정우가 1인 4역(제작·주연·연출·각본)으로 완성한 영화 '짱구'는 다소 이질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바람'에 이어 16년 만에 돌아온 짱구를 향한 일부 평단과 관객의 시선은 다소 차갑다. 10대의 빛나던 치기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20대 후반이 되도록 99번이나 오디션에 낙방하고,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짱구의 모습은 당혹스러웠을 테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는 부분은 단연 시간이 흘렀음에도 인물이 미숙한 태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20대는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매뉴얼대로 성장하는 극적인 시간이었던가.
냉담한 반응을 한 꺼풀 벗겨내고 영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 작품이 왜 가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짱구'는 억지스러운 성장 서사의 강박을 내던지고 우리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20대의 부끄러운 민낯을 스크린에 전시한 작품이다. 적어도 내겐, 끝내 멋지게 포장되지 못한 채 어른의 문턱에서 오래 서성이는 짱구의 모습에 더 마음이 쓰였다.
현실의 20대는 고등학교 시절의 어설픔을 채 버리지 못한 채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수없이 깨지고 뒷걸음질 치는 정체기에 가깝다. 정우는 스스로 메가폰을 잡은 자전적 이야기임에도 지나온 시간을 미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았다. 허세 가득한 표정으로 오디션장에서 엉망진창의 연기를 선보이는 짱구의 모습은 그저 코미디가 아니라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던 시절에 대한 뼈아픈 자기 객관화다.
미숙함을 단숨에 깨치고 일어나는 영화적 판타지 대신 뜻대로 안 풀려도 그저 하루하루 털고 일어나는 버티기를 보여준 것이다. 영화는 성장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생존이 급급해 성장조차 유예된 청춘의 지독한 현실을 그려낸다.
정우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나 '이 구역의 미친 X'의 휘오를 통해 어디에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어디에도 없는 '보통 남자'의 판타지를 가장 절묘하게 구현해 내는 배우다. 이번 '짱구'에서도 그는 특유의 무심함과 지질함 속에 숨겨진 삶의 투박한 온기를 완벽하게 끌어낸다. 전기세도 못 내고 깡냉이(조범규), 장재(신승호)와 뒤엉켜 사는 짠내 나는 티키타카는 잘 꾸며진 세트장이 줄 수 없는 진한 생활감을 풍긴다.
특히 정우, 신승호, 조범규 세 사람이 빚어내는 앙상블은 꽤 매끈하다. 무엇보다 조범규는 '현실 짱구'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 제 나이대의 날것의 생생함을 더하고, 신승호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타율 높은 유머의 감도를 탁월하게 조율해 낸다. 팍팍하고 지질한 현실 속에서도 투박하게 서로를 품어주는 세 배우의 찰떡같은 호흡은 극에 유쾌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자칫 우울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 서사 속에서 이들이 뿜어내는 '찐친' 케미스트리는 묘한 온기를 발산하며 관객들에게 쉴 틈 없는 웃음과 숨통을 틔워준다.
무엇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마지막 오디션 독백 신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여운 짙다. 배우의 꿈을 끝까지 지지해 주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짙게 서린 이 장면을 마주하고 나면, 관객은 정우라는 배우가 어떻게 그 긴 무명의 터널을 뚫고 지금의 자리에 섰는지 납득하게 된다.
모두가 성공의 결과물만을 전시하려 드는 시대에 정우는 '짱구'를 통해 기약 없는 과정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초대했다. 영광스러운 트로피나 레드카펫 대신 또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디션장과 촬영장으로 향하는 짱구의 황소걸음을 비추며.
짱구의 지질하지만 눈물겨운 버티기에 공감하며 기꺼이 응답하는 관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짱구'는 개봉 8일째인 29일 오전 누적 관객 수 2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전작 '바람'의 최종 스코어를 가뿐히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동기간 대비 약 2배나 빠른 흥행 속도다.
특히 작은 규모의 영화라 상영 횟수가 적음에도 한국 영화 좌석 판매율 상위권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차당 관객 밀도가 가장 높은 한국 영화 중 한 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작품이 품은 투박한 공감대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정우라는 배우가 통과해 온 17년의 시간만큼 두꺼워진 진심이 스크린에 묵직하게 배어든 결과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세련되지 못한 과거의 답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이불킥'의 순간들을 꾸역꾸역 견디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청춘과 '어른이'들에게 '짱구'는 공허함과 서러움을 삼킨 뒤 들이키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 같은 위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