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신중하게 대본을 읽고 공부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을 마친 가수 겸 배우 아이유는 18일 SNS를 통해 이렇게 고백하며 고개숙였다.
남자 주인공 이안대군을 맡은 배우 변우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필 편지를 올리며 "배우로서 연기뿐 아니라 작품이 가진 메시지와 맥락까지 더욱 책임감 있게 살펴보고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기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례적이다. ‘21세기 대군부인’ 이전에도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작품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남녀 주인공이 직접 발벗고 나서서 사과의 뜻을 밝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만큼 이 사안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픽션(fiction), 즉 창작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대군부인’의 배경은 입헌군주제다. 자유민주공화국인 현재 대한민국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속 설정의 오류가 ‘역사 왜곡’ 논쟁으로 흐르고, 대중이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5일 방송된 ‘21세기 대군부인’ 11회에서는 주인공 이안대군(변우석)의 왕 즉위식이 열렸다. 이 장면에서 신하들은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쳤다. 무언가 어색하다. 우리에게는 "만세 만세 만만세"가 익숙하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외침이라 손꼽히는 3·1운동 때도 "대한민국 만세"라고 소리높였다.
‘만세’(萬歲)는 한자 표기다. 경축, 환호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손을 높이 들면서 외치는 말과 동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만’은 ‘일만 만’자를 쓴다. 그렇다면 ‘천세’(千歲는) 무엇일까? ‘천’은 ‘일천 천’이기 때문에 ‘천세’는 ‘만세’보다 당연히 더 낮은 표현이다. 이는 신하가 왕에게 하는 하나의 인사다. 역사적으로 황제(중국)만이 ‘만세’를 받을 수 있었던 시절, 제후국은 ‘천세’를 외쳤다는 것이다.
단순 실수일까? 이 날 이안대군은 구류면류관을 썼다. 자주국의 황제는 십이면류관을 쓴다. 즉 ‘21세기 대군부인’은 일관되게 극 중 한국의 왕을 제후국의 왕 수준으로 그린 셈이다.
이런 표현에 대중과 학계에 더 크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이런 부적절한 설정이 한국사를 중국 역사 하위 체계로 종속시키려는 동북공정 주장의 빌미가 되거나 맞닿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2021년, 방송 2회 만에 폐지됐던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를 돌아보자. 조선 태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국형 크리쳐 사극을 표방한 이 드라마는 기방 장면이 도마에 올랐다. 중국식 만두를 비롯해 중국 술과 월병, 피단(오리알을 삭힌 중국 음식) 등이 배치됐다. 조선시대가 배경임에도 건물, 음식, 식탁모양 등 중국풍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당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중국 네티즌들이 ‘당시 한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드라마 장면을 옹호하기 시작했다"면서 "최근 중국이 복, 김치, 판소리 등을 자신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신(新)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21세기 대군부인’ 속 부적절한 설정 역시 동북공정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도 적잖다. ‘큰별쌤’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한국사 최태성 강사도 쓴소리를 냈다. 논란이 된 작품 속 설정을 두고 최 강사는 "줄이 9개? 황제는 12개야", "천천세? 황제는 만만세야"라며 "이제 정신 좀 차리시옵소서"라고 지적했다.
최근 한류 콘텐츠는 한국을 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되고 있다. ‘21세기 대군부인’의 경우 글로벌 OTT 디즈니 를 통해 공급됐고, 공개 후 28일간 북미, 유럽, 중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시청된 한국 시리즈에 등극했다. 그만큼 역사 왜곡 설정에 노출된 외국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류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의 역사 의식이 더욱 크게 요구되는 이유다.
최 강사는 "지금 우리는 전 세계 한류 문화를 이끌고 있다. 드라마, 영화?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다. 우리의 이미지가 빠르게 전파, 각인되고 있다"면서 "이제는 그 격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역사학계를 존중해 주기 바란다. 배우들의 출연료는 몇 억원을 아낌없이 지불하면서 역사 고증 비용은 몇 십만으로 왜 퉁치려 하시는지. 왜 그리도 아까워하시는지.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 고증에 드는 시간은 왜 그리도 무시하시는지"라고 안타까워했다.
윤준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