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희준이 '허수아비'를 통해 또 한번 강렬한 얼굴을 꺼내 보였다. 권력의 단맛과 끝없는 인정 욕구 사이에서 흔들리는 차시영 역을 맡아 인물의 욕망과 결핍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누군가에게는 비굴했고 누군가에게는 잔혹했으며, 끝내 진실보다 자기 생존을 택한 인물이다. 이희준은 그 복합적인 균열을 차갑고도 집요하게 밀어붙이며 극의 긴장감을 책임졌다.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는 지난 26일 12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최종회는 전국 8.1%, 수도권 8.3%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올해 ENA 월화드라마 시청률 1위라는 성과도 남겼다.
이희준에게 이번 작품은 박해수(강태주 역)와 재회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두 사람은 무명 시절 극단 생활을 함께했고, 현재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악연'으로 호흡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앞서 2021년 함께 출연한 '키마이라'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이 '허수아비'로 다시 만났고, 작품이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며 둘의 조합은 또 한번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희준은 박해수와 다시 호흡하게 된 것에 대해 반가움과 신뢰를 함께 내비쳤다. 오랜 인연이 있는 만큼 부담보다 신뢰가 컸고, 서로의 연기를 의식하기보다 함께 장면을 완성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저희가 오래전부터 연극을 같이 했고, 드라마도 여러 번 함께했어요. 그중에는 잘 안된 드라마도 있었지만요(웃음). '허수아비'는 각자 역할에 어울려 따로 캐스팅된 건데도 소속사 대표님이 둘이 같이해서 잘 안된 작품이 있으니 또 같이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잘 되면 계속 같이하고, 안 되면 같이 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씀하셨죠. 그런데 '허수아비'가 잘 됐으니 앞으로도 또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두 사람의 관계는 극 안에서는 적대적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오히려 든든한 기반이 됐다. 강태주와 차시영은 30년에 걸쳐 연쇄 살인사건의 진실과 은폐, 죄책감과 욕망을 사이에 두고 부딪힌다.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 필요했던 만큼 배우들 사이의 신뢰는 장면의 밀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해수와 저는 '이 배우가 나보다 잘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없는 관계예요. 서로 잘하길 응원하는 사이죠. 함께 걸으면서 인생 이야기, 연기 이야기도 하고요. 연기적으로 어떤 말을 해도 서로 기분 나쁘지 않은 관계라는 게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어려운 신을 찍을 때도 둘이 이미 많이 연습해 놓은 상태였고, 감독님도 저희 둘을 많이 믿어주셨어요. 모니터를 하다 보니 좋은 관계 덕분에 만들어지는 에너지가 보이더라고요."
이희준은 '허수아비'의 성공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작품이 일반적인 장르물의 문법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반부만 보면 강태주와 차시영이 함께 진범을 좇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작품은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잘못된 수사와 권력의 선택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지에 더 집중했다.
"이렇게 잘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일반적인 흐름의 드라마가 아니잖아요. 처음 작품 제안을 받았을 때 4부까지 대본을 봤어요. 보통이라면 주인공 둘이 힘을 합쳐 범인을 잡는 흐름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그보다 30년 동안 한 마을에서 계속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모두가 고통받은 시간과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짜릿했어요. 일반적이지 않아서 대중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멋지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집중했죠. 그런데 이렇게 시청률까지 잘 나와서 감사하고 행복해요."
'허수아비'는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범죄의 잔혹성이나 추적의 쾌감에만 머물지 않았다. 진범이 드러난 뒤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 누명을 쓴 피해자, 침묵한 권력, 진실을 외면한 사회의 시간을 함께 들여다봤다. 이희준은 그 지점이 박준우 감독과 이지현 작가의 "용감한 선택"이었다고 봤다.
"10부쯤까지 범인이 누군지 모르게 끌고 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초반에 범인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억울하게 사람들이 잡혀가고, 각 인물의 욕망 때문에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줘요. 30년이 지난 뒤에도 누군가는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 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감추려 하죠. 그런 기획 의도가 정말 멋있었어요. 오히려 용감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것 같아요."
'허수아비' 현장은 작품이 가진 무게만큼 진지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장르물인 만큼 배우와 제작진 모두 쉽게 소비되는 범죄극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희준은 그 태도가 화면에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소재 자체가 그렇다 보니 다들 임하는 자세가 달랐어요. 소품도 리얼한 장소에 가서 준비했고, 사진 소품 하나도 정성을 다했어요.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죠. 드라마가 끝나고 사랑받는 걸 보니 그런 것들이 다 모아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박)해수 배우가 리딩하고 촬영하기 전에 제게 어떻게 임하면 좋을지 물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척하는 연기는 하지 말자'고 했어요. 그 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런 자세가 된 것 같아요."
차시영은 그 구조 안에서 가장 불편한 얼굴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묻고, 누군가의 억울함을 외면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거짓 위에 권력을 쌓아 올린다. 이희준은 차시영을 단순한 악인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작점에 놓인 결핍을 먼저 들여다봤다.
"연기하면서 감사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과거의 트라우마와 성장 과정이 정말 섬세하게 설정돼 있었거든요. 이런 인물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연기하면서 재미있었어요. 차시영이 괴물 같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그가 붙든 차시영의 핵심은 인정 욕구였다. 혼외 자식으로 뒤늦게 집에 들인 아이,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고 느끼는 아이의 두려움이 성인이 된 차시영의 욕망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이희준은 그 출발점을 상상하는 과정이 배우로서 흥미로웠다고 했다.
"드라마 배경 상 이복동생이나 두 번째 부인이 있을 수 있는 시대예요. 시영이가 아버지 집에 8, 9살쯤에 들어가요.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예쁨받고 싶었을까, 예쁨받지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다고 얼마나 두려워했을까를 상상했어요."
이희준이 바라본 차시영의 악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던 대목은 혜진의 시신 은닉이었다. 연쇄살인범을 검거했다는 공로를 앞두고 기존 피해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된 혜진의 시신이 발견되자 차시영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 사건을 덮는 쪽을 택한다. 이희준에게도 그 장면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아이의 시신을 다시 묻을 때 '우리가 내일 포상받는다'는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아이를 묻을 수 있지 싶었어요. 또 '지금까지는 연쇄살인범이고, 다음은 모방범이다'라는 대사를 보면서 이 사람은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구나 싶었죠. 검사로서 빨리 실적을 내고 자기 계획을 위한 단계로만 보는 거예요. 누가 진짜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죠. 매번 진범을 발표하지만 이전에 잘못 잡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잖아요. 대중도 쉽게 잊고요."
차시영이 강태주를 향해 품은 감정 역시 단순한 적의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친구이자, 함께 일하고 싶었던 동료, 동시에 자기 생존을 위해 밀어내야 했던 사람. 이희준은 차시영의 배신과 폭력 뒤에도 인정 욕구와 생존 본능이 뒤엉켜 있었다고 해석했다.
"시영은 어릴 때 태주를 정말 좋아했다고 생각해요. 현재도 같이 일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인정 욕구와 욕망이 너무 크니까 생존을 위해 과감히 버리는 선택을 한 거죠.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고요. 마지막에 아들처럼 키운 조카 차영범(송건희)이 과거 잘못을 인정만 하면 용서하겠다고 하는데도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결국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가 되죠."
차시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희준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다. 현재 8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는 아이가 부모와 환경의 영향을 흡수하는 시기에 어떤 폭력과 결핍을 겪는지가 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 더 실감하게 됐다고 했다.
"제가 8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그 나이가 정말 스펀지 같은 때예요. 시영이 같은 일을 겪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게 됐어요. 저 나이에 아버지가 성적이 떨어졌다고 체벌하고 쫓아내겠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가 어떻게 커갈까 싶었죠. 아들을 보면서 내가 조금만 영향을 줘도 아이가 영향을 받는데,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시기에 그런 일을 겪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했어요."
이희준은 강렬하고 입체적인 인물을 연이어 맡아왔다. '허수아비'의 차시영 역시 그 연장선에 있지만 그는 이제 조금 다른 얼굴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의 반응도 그런 마음에 영향을 줬다.
"주어진 걸 감사하게 하는 마음이에요. 최근에 의도치 않게 장르물과 악역을 많이 해서 이제는 좀 호감 가고 사랑받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부모님이 오랜만에 TV에 나오는데 너무 나쁜 놈으로 나오니까 착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역할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웃음)."
배우로서 방향도 분명하다. 젊은 시절 자신을 배려해 준 선배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자신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제가 20, 30대 때 연극을 시작할 때 극단에서 문성근, 강신일, 이성민, 최덕문, 정석용 선배님들과 다 같이 공연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제 연기밖에 안 보였는데, 선배들이 저를 얼마나 배려해 줬는지 이제야 보여요. 이제 제가 그 선배님들 나이가 됐잖아요. 후배들에게 제가 좋아했던 선배들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