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이자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뮤지컬 '시카고'의 주연 록시 하트 역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아이비는 2012년 국내공연 '시카고'의 록시 하트 역에 출연하여 한국뮤지컬대상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2024년까지 여섯 시즌 동안 록시 하트로 무대에 올랐다. 국내 공연에 참여한 '시카고' 해외 스태프의 추천으로 지난해 여러 차례 영상 오디션을 보냈고 마침내 브로드웨이의 록시 하트 역을 따낸 것이다.
국내 배우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소정이 1995년 '미스 사이공' 미국 투어공연을 거쳐 1998년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킴 역을 맡았다. 1996년에는 이태원이 '왕과 나'의 티앙 역으로 출연했다. 웨스트엔드에서는 2014년 '미스 사이공' 런던 공연에 홍광호가 투이 역을 맡았고, 2015-2016년에는 김수하가 앙상블과 킴 커버로 출연했다. 커버는 메인 배우가 부상 등으로 출연이 어려울 때만 대신 투입되는 역할이었지만, 김수하는 연출팀의 인정을 받으며 30여 번이나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이후 그는 '미스 사이공' 인터내셔널 투어에서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이외에도 조상웅이 웨스트엔드 '미스 사이공'에서 투이 역을 맡는 등 한국 배우들이 영미권 무대에서 활동해왔다. 한인 교포 배우까지 포함한다면 이동훈, 마이클 리, 전나영 등 그 사례는 더욱 넓어진다.
지금껏 동양권 배우는 주로 '미스 사이공', '왕과 나', '남태평양' 등 동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주역을 맡아왔다. 브로드웨이는 오랫동안 백인 중심의 캐스팅 관행과 보수적인 제작 문화를 유지해온 곳이다. 그러나 문화 전반에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브로드웨이도 역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색인종을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컬러 퍼플', '인 더 하이츠'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를 유색인종 배우가 연기한 힙합 뮤지컬 '해밀턴'(2015)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흐름을 바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21년 코로나19로 인한 셧다운 이후 공연을 재개하면서 '오페라의 유령'은 흑인배우 에밀리 코아추(Emilie Kouatchou)를 크리스틴 역에 캐스팅했다. 이에 앞서 2019년에는 ‘걘 금발이야’라는 대사가 있음에도 글린다 역에 흑인배우 브리티스 존슨(Brittney Johnson)을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아이비의 브로드웨이 진출은 역시 문화계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컬러-블라인드(Color-Blind)' 캐스팅의 흐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동시에 한때 뮤지컬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이 영미권 시장에서도 기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2025년에는 한국에서 먼저 제작된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을 6개 부문을 석권했고, 2024년에는 한국 프로듀서 신춘수가 브로드웨이에서 대형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올려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두 작품은 여전히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고 있다. 웨스트엔드에서도 '마리 퀴리'(2024)와 '더 라스트 맨'(2026)이 공연되면서, 한때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던 영미권 뮤지컬 시장 진출 사례가 하나둘 늘고 있다. 작품의 해외 공연이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이제 배우들 역시 직접 세계 시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배우들의 해외 활동을 영미권 무대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시각을 아시아권으로 돌리면, 일본 무대는 오래전부터 한국 배우들이 실력을 증명해온 중요한 장이었다. 중국 시장에 창작자와 음악감독, 연출가 등 제작진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면, 일본 무대에서는 배우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올해 10월 토호가 제작하는 '미스 사이공' 존 역에 한국 배우 최우혁이 캐스팅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뮤지컬 제작사 토호는 한국 배우들을 꾸준히 기용해왔다. '레미제라블' 장발장 역에 일본 배우와 함께 김준현(2013년), 양준모(2015년, 2017년)가 멀티캐스팅되었다. '미스 사이공'의 존 역 역시 한국 배우들이 종종 맡아온 배역이다. 최우혁에 앞서 2016년에는 박민성이 존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2015년 웨스트엔드에서 '미스 사이공'의 킴으로 데뷔한 김수하는 원래 일본 무대를 준비하다 오디션 영상이 카메론 매킨토시의 눈에 들어 웨스트엔드에 먼저 진출한 경우다. 그는 2016년 당초 계획대로 일본 무대에서 킴으로 설 수 있었다.
토호가 개별 작품에 역할 캐스팅을 했다면 일본 극단 시키(四季)는 보다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아시아 배우를 발굴했다. 시키는 전임 아사리 게이타 대표 시절부터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배우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시키 뮤지컬이 아시아 시장으로 확장하기 위한 전략이면서 역량이 뛰어난 배우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 현재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은태, 차지연, 김준현, 이경수, 최현주, 고영빈, 강태을 등이 시키 단원으로 입단해 뮤지컬 교육을 받고 안정된 환경에서 배우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뮤지컬 시장은 큰 격차가 있었다. 한국 배우들은 안정적인 교육과 작품 활동이 보장된 극단 시키 단원에 매력을 느끼고, 시키 오디션에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시키 또한 가창력이 뛰어나고 일본어 습득이 빠른 한국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2003년에는 한국에서 시키 입단 오디션을 개최하기도 했다. 여전히 시키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적지 않다. 불과 지난해에는 새롭게 시키 단원에 입단한 한국 배우가 10명에 이른다.
아이비는 오는 8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뉴욕 앰버서더 극장 무대에 선다. 뛰어난 가창력과 적응력을 지닌 한국 배우들은 이제 국내를 넘어 아시아와 영미권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한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은 이제 작품의 수출을 넘어, 배우들이 직접 세계의 무대 위에서 경쟁하고 인정받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박병성(공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