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를 지킬 줄 아는 늙음, 최민식에게서 우뚝하다

윤지훈(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9.22 13:39

6일 연속 흥행 1위 '인턴'으로 세대 통합 이루다
인간미 넘치는 관록의 연기로 관객 마음 적시다

영화 '인턴'의 주연 최민식은 인간미 넘치는 관록의 연기로 6일 연속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세대 통합을 이루었다. 극 중 실버 인턴은 수십 년간 일했던 지도책 출판사 건물에 들어선 패션 회사에서 물류창고를 정리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젊은 대표에게 조언을 강요하는 대신 함께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일상의 위안을 전함으로써 늙음의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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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을 줄 수 없다면 할 수 없지. 찾아서 하면 되겠지.

창업 3년 만에 굴지의 스타트업 브랜드로 자라난 패션 회사의 젊은 사원들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함은 아니야.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실버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내어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젊은 사원들에게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꼰대’로만 비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무엇보다 마침 수십 년 동안 몸담아 일했던 지도책 출판사 건물 속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니, 이 또한 감사한 일 아닌가. 그저 그 속에서 보낸 지난 시간의 수고로움, 그것들이 가져다준 삶의 작은 분주함과 보람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말이 인턴이지, 일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다듬어줄 여유가 젊은 사원들에게는 전혀 없어 보이네. 그렇다고 하릴없이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뭔가 할 일이 없을까.

눈 돌려보니 젊은 사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그날그날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 자신들이 무심코 한쪽 책상 위에 쌓아놓은 샘플 옷가지들이며, 마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것처럼 지저분하고 어두컴컴한 물류창고는 그들 눈에 들어설 자리가 없겠네.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예전엔 보일러실이었던 물류창고를 말끔하게 정리했어. 어떤 계보도, 체계도 없이 쌓이고 엉킨 채 어지러이 놓인 물건들을 종류대로 상자별로 나눠 차곡차곡 넣어두었어. 바닥을 쓸고, 조금씩 비뚤어진 펜트리의 줄도 새롭게 맞춰 다시 세웠지.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모든 게 달라져 버렸지만, 온전히 살아남은 것, 바깥 풍경이 제법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창이었어. 창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니 그럴듯한 풍경 하나를 선물로 받은 셈이지. 그 앞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생각을 다듬어야 할 때, 아님 그저 잠시 잠깐의 쉼을 위해 창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했지.

얼마나 다행이야. 일에 허덕일 때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던 창과 그것이 맞춤하게 보여주는 바깥 풍경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말이야. 창밖에서 서울의 밤을 밝혀주는 남산타워의 깜빡이는 불빛이 새어 들어와 물류창고에 한 줄기 빛줄기를 내려주고 있네. 예전처럼.

어느새 옆자리엔 패션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젊은 여성 대표가 앉아 있어.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 자신의 힘겨움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표정도 역력하네. 무슨 일이냐, 왜 그러느냐, 굳이 물을 이유는 없어. 젊음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실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나도 젊어봐서 다 안다’는 어쭙잖은 경험의 강요(실상 늙음의 현실 앞에 허덕이면서)…. 그런 것 따위 필요 없지.

더욱이 그 젊음 역시 엄연한 타인일진대, 겪어가는 세상살이가 다 같겠는가. 늙어감이 비록 신산하게 걸어왔다지만 바로 그 덕에 오늘의 새로움을 맞이할 수 있다지만, 그건 이제 지나가 버린 시간에 불과할 뿐. 그것과 젊음의 오늘은 전혀 다른 세상일 터이니, 그저 입 다물고 귀만 열 일이다. 그래서 ‘라떼는말야’도 금지.

그렇다고 바로 이 건물 속에서 지내온 수십 년의 세월에 관해 묻는데 또 굳이 답변을 마다할 이유도 없지. 그 시간 속에 쌓아둔 회한과 후회와 추억이 없을 리 없지만, 그걸 장황히 풀어내 봐야 무슨 소용이랴. 난 이렇게 살아왔다는 말 대신 저 창밖 남산타워의 깜빡이는 불빛, 그 위로 서울의 밤하늘을 비추는 둥그런 달의 표정만을 그저 유심히 들여다볼 뿐이지. 유심히…, 깊게….

대표에게도 그리 권하지. 유심한지 깊은지 모를 시선으로 그 풍경을 보네. 마치 세상 처음 보는 광경처럼 신기한 표정으로. 지난 3년의 시간,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일에 매달려왔을 테니, 그런 풍경을 제대로 시선에 담아본 적 있을까.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표정이 이내 환해지네. 시름도 좀 달래어진 모양이야.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저 원래 있었던 자리였는데, 그걸 새롭게 발견하고 거기서 일상의 새롭고도 작은 힘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시름이야 언제든, 늘, 찾아오는 것. 완전한 떨침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 그렇지만 이 소박하고 정성스러워 보이는 밤하늘의 달빛 풍경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해준 것만으로도 늙음의 할 일을 다 한 게 아닐까. 그럴 때 늙음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아닐까.

땅 아래 튼실하게 뿌리 내려 다채로운 삶의 분주함을 이어가게 해주는 오래된 건물, 사람과 시간의 흐름이 일궈온 달라짐의 시간일지언정 여전히 잘 익어가는 풍경,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도 스스로 존재감을 채워가며 제대로 짜인 창. 늙음과 젊음의 차이가 적어도 그 앞에서는 전혀 없음을 알게 해주니, 모두가 각기 제자리를 잃지 않고 지켜준 덕분일 터이다.

P.S. 영화 ‘인턴’의 주연 최민식은 아직 늙지 않았으되, 또 다른 새로움으로 이 모든 제자리를 지키는 데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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