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지 기개가 없나?"… 영화라는 외길을 걷는 박해일의 뚝심

최재욱 ize 기자
2026.10.15 14:43

데칼코마니 같았던 '암살자(들"의 사회부장 재환과 배우 박해일

배우 박해일은 영화 '암살자(들)'에서 강직한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역을 맡아 300만 관객 돌파를 이끌었다. 그는 데뷔 후 20년 넘게 TV 드라마나 OTT 시리즈 대신 영화라는 외길을 걸으며 충무로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역사 왜곡 논란과 영화제 파행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관객과의 약속과 배우로서의 원칙을 지키는 뚝심 있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주)하이브미디어코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충무로의 자존심으로 불렸던 영화배우 강수연이 술자리나 사석에서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한국 영화를 대표해온 배우로서의 자존심과 기개를 피력하던 표현으로 영화인들 사이에서 수없이 회자되었다. 류승완 감독이 영화 ‘베테랑’에서 경찰의 자존심을 표현하는 대사로 인용하며 대중에게도 “돈은 없어도 모양 빠지게 살지 말자”는 의미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자(들)’로 화제의 중심에 선 배우 박해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데뷔한 박해일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십 편의 영화에서 주옥같은 연기를 펼치며 충무로의 자존심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동료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TV 드라마와 OTT 시리즈를 넘나들며 폭넓게 활동할 때도, 박해일은 자신의 뿌리인 영화에 대한 애정과 긍지로 좌고우면하지 않은 채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암살자(들)’에서 올곧은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역이 꼭 들어맞았던 이유 역시 박해일 특유의 강직한 결 때문이다. 어떤 외압 앞에서도 옳다고 믿는 신념을 향해 직진하는 재환의 모습은, 배우로서의 뚝심을 지키며 묵묵히 걸어온 박해일의 실제 궤적과 겹쳐지며 관객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무리 시대가 엄혹해도 불의에 결코 눈감지 않고 진실을 직시하겠다”는 재환의 태도는 ‘암살자(들)’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우리 시대 지식인이 지켜내야 할 양심의 무게를 오롯이 대변한다.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얼굴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아래 드리운 호수처럼 맑은 눈빛, 조용조용 읊조리는 어조는 그가 만약 조선에 태어났다면 필경 꼿꼿한 선비나 문장가의 삶을 살았을 것임을 직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 곱고 담백한 선의 이면에는 늘 뜨거운 활화산 같은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부조리한 시대를 묵묵히 응시하다가도, 한순간 영혼을 던져 파열음을 내는 지식인의 초상을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구현해온 배우다.

최근 그가 보여준 행보 역시 이러한 궤적의 연장선에 있다. 치열한 진실 공방의 최전선에서 고뇌하는 언론인의 면모를 드러낼 때나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인물을 연기할 때, 그의 모습은 연기라는 본령 하나만을 위해 세상의 온갖 유혹을 털어내고 직진해온 장인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

사진제공=(주)하이브미디어코프

역사를 대하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진지하고도 위태로웠다. 조철현 감독의 ‘나랏말싸미’에서 신미대사를 연기하며 겪었던 역사 왜곡 논란의 파고는 배우 개인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였을 것이다. 작품이 마주한 비판과 역사적 쟁점 한가운데서 그가 감내해야 했던 무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암살자(들)’에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러한 지식인적 기질과 고집스러움은 스크린 밖 삶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역사 해석 논란으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파행 속에서도, 그는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화제 현장을 직접 찾았다. 이 모습은 박해일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실리와 타협, 이미지 관리와 손익 계산이 일상이 된 연예계에서 그는 오직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과 약속을 위해 기꺼이 몸을 사리지 않는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도 오래전 약속한 지방 영화제 참석을 지켜낸 행보는 그의 단단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선 고운 얼굴 뒤에 감춰진 굳건한 심지. 박해일의 연기가 늘 우리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인물을 흉내 내는 연기자가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제 살갗으로 받아내는 드문 ‘배우-지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바람 치는 역사의 길목마다 그가 끝내 외면하지 않고 던질 묵직한 시선을 우리가 계속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기에 한 정치인이 내놓은 “관객 한 명당 200원 때문에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를 잘 아는 이들에게 어처구니없는 궤변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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