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첩보 로맨스 ‘100일의 거짓말’이 6화를 기해 본격적인 멜로 무드에 접어들었다.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상대를 속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사랑조차 첩보의 일부가 되고, 믿음은 언제든 배신으로 뒤집힐 수 있는 불신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올랐다.
tvN 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연출 유인식 김윤진, 극본 류보리)은 1930년대 경성을 무대로 밀정과 통역관의 위험한 만남을 그린다. 총독부의 삼엄한 심장부로 파고든 소매치기 출신 밀정과 정무총감의 양자이자 일본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조선인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서로를 속이고 속으며 마음을 여는 과정이 그려진다. ‘역사가 스포’라는 예견된 새드엔딩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이들의 로맨스와 민족을 위한 구국의 노력이 가슴을 졸이게 한다.
고아로 자라 소매치기로 연명해 온 가경(김유정)은 구국단원 소란(김현주)의 가방을 훔친다. 총알이 가득한 가방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소란의 집을 찾은 가경은 정무총감 사토(진선규)의 암살 작전에 휘말린다. 소란은 가경에게 미국으로 보내주는 대가로 100일 동안 총독부의 기밀을 빼돌려 달라고 제안한다. 어린 시절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총독부 통역관으로 잠입한 가경. 자신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토의 양자이자 통역관인 히데오(박진영)의 마음을 얻기 위해 “좋아한다”는 거짓 고백을 한다. 뻔뻔한 소매치기에 불륜녀, 거짓말쟁이라 생각했던 가경에게 점점 끌리는 히데오. 일본인의 탄압 속에 쓰러져가는 조선인들을 보며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고 민족을 지켜내기 위한 위험한 길로 들어선다.
총 6화까지 방영된 ‘100일의 거짓말’은 출연진의 탄탄한 연기력에 힘입어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주연을 맡은 김유정은 아역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작품에서 한층 성숙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유정이 연기한 ‘이가경/금서희’는 독립이라는 대의보다 당장의 생존과 미국행을 우선시하고, 거창한 신념보다는 눈앞의 돈과 기회를 좇는다. 위기 앞에서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며, 필요하다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귀동냥으로 익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소매치기 기술마저 최고의 경지에 오를 만큼 타고난 영특함을 지닌 인물이다.
‘100일의 거짓말’ 초반부의 경쾌하고 코믹한 분위기는 김유정의 능청스러운 표정과 재치 있는 말투에 힘입은 바 크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극의 리듬을 주도하며 매끄러운 출발을 이끈다. 여기에 극이 진행되면서 사랑의 감정과 민족, 일본에 대한 반감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변화하는 캐릭터를 안정감 있게 선보이고 있다.
박진영은 김유정과는 또 다른 결의 연기로 극의 균형을 잡는다. 그가 연기하는 사토 히데오는 조선인 김태웅이라는 본래의 정체를 감춘 채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조선총독부의 엘리트 통역관이자 권력자의 양자라는 지위는 그에게 특권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을 안긴다. 박진영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표정과 차분한 말투로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한다. 김유정과 함께할 때는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미묘한 설렘을, 총독부 내부에서는 냉정하고 빈틈없는 통역관의 얼굴을 보여준다. 특히 언어와 신분, 정체성 자체가 생존의 수단이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통역이라는 직업적 설정을 연기의 중요한 장치로 활용한다.
구국단의 저격수 소란을 연기한 김현주는 극의 무게중심을 한층 묵직하게 만든다. 유소란은 사적인 복수와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동시에 품은 인물이다. 일본군에 딸을 잃고 남편과도 오랜 시간 생이별을 겪은 그의 삶에는 분노와 상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김현주는 모성애와 분노, 냉철함을 자유롭게 오가며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짊어진 인물을 비장하게 그려낸다. 여기에 6화를 끝으로 13년 전 헤어진 아내 소란을 향한 진심으로 투박하게 드러내며 장렬하게 퇴장한 금석중 역의 감우성과 출세 욕망으로 가득한 일본인 사토 신이치로 분한 진선규 등이 극을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위장결혼이지만 소란을 향한 순정을 가슴에 담은 유필립 역을 연기하는 이무생의 존재감도 남다르다.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의미를 읽어야 하는 인물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인물들, 그리고 첩보 작전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기존 멜로물과 차별화되는 요소다. ‘100일의 거짓말’은 익숙한 시대극의 외피 안에 첩보와 로맨스, 독립을 향한 열망을 촘촘하게 엮어낸다. 김유정의 생기 넘치는 에너지와 박진영의 절제된 감정선, 김현주의 묵직한 존재감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극을 견인한다. 두 남녀의 멜로가 깊어질 것을 예고한 ‘100일의 거짓말’이 첩보극의 긴장감과 극적 완성도를 유지하며 또 한 편의 수작으로 남을 수 있을지 기대를 걸어본다.
정명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