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일몰제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배경에는 지자체와 정치권의 소극적인 대응 구조도 자리하고 있다. 일몰제가 적용될 경우 해당 정비사업장이 '위험 사업장'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지자체와 정치권 모두 사업 재개 가능성이 부족한 사업장마저 그냥 눈감아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몰 대상이라는 인식만으로도 해당 사업장은 금융 조달과 시공사 선정,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정비사업 특성상 장기간 추진을 전제로 자금과 신뢰가 쌓이는데 일몰제 적용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만으로 사업 지속성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몰 대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조합은 물론 시공사와 금융권 모두 한발 물러서게 된다"며 "실제 해제 여부와 무관하게 사업성이 떨어지는 곳으로 인식되는 낙인 효과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자치구 역시 적극적인 판단에 나서기 어렵다는 평가다. 제도상 일몰 요건이 충족되더라도 정비구역 해제는 지역 민원과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행정 부담이 상당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조합원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민원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고 지자체 역시 굳이 나서 미움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치권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정비사업은 주민 재산권과 직결되는 이슈인 만큼 일몰제 적용이나 해제 검토 자체가 정치적 역풍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몰 대상 사업장이라는 인식만으로도 해당 지역의 반발이 거셀 수 있다"며 "정비사업 현장의 혼란은 곧바로 민원과 표심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업계와 정치권 관계자들은 일몰제가 실제로 적용되기보다는 적용 가능성만 남긴 채 현장을 압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요건은 존재하지만 언제, 어떤 기준으로 적용될지 불명확해진 만큼 조합과 시공사, 금융권 등 연관된 사람들 모두가 눈치만 보게 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설명이다.
현장에서는 이 같은 불확실성이 정비사업 추진 전략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몰제 적용을 피하기 위해 실질적 진전 없이 형식적인 절차만 반복하거나 최소 요건 충족에만 집중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업을 정리하거나 속도를 내기보다는 제도를 피해 가기 위한 시간 끌기가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결국 제도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책임 있게 집행하지 않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일몰제가 사업을 정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남긴 채 현장을 묶어두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갈등을 해소하는 제도가 아니라 갈등의 시간만 미루는 제도로 남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