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한국 아닌 실리콘밸리서 시작한 이유[투데이 窓/정영훈]

정영훈 엑스엘에이트 대표
2026.07.05 11:00

[UFO 칼럼] 정영훈 엑스엘에이트 대표

정영훈 엑스엘에이트 대표

미국 구글 본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입사 1년6개월 만에 시니어 엔지니어에서 스태프 엔지니어로 승진했다. 또한 구글 역사상 검색팀과 지도팀 사이 최대 규모의 협업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기회도 얻었다. 커리어적으로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이던 2019년, 그동안 운 좋게 얻었던 여러 타이틀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미국, 그것도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창업을 결심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의외로 제품이 아니었다. '회사를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였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빅테크를 떠나 한국의 대기업이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사람들, 혹은 창업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내가 만드는 회사는 미국에서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에서 시작해야 할까.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국계 테크 창업자들의 작은 세미나에서 흥미로운 토론이 있었다. 한국계든 인도계든, 미국에서 창업하는 이민자 창업자들이 자국에 엔지니어링 팀을 두는 전략의 장단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점은 명확했다. 자국의 우수한 엔지니어를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채용할 수 있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게 이는 매우 강력한 경쟁력이다.

단점도 분명했다. 회사가 커질수록 글로벌 조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 된다. 초기에는 비용 효율이 장점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 확장의 제약이 되기도 한다. 이후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뒤 미국 진출을 고민하는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교류하면서, 필자는 회사의 시작 위치가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많은 사람이 이를 단순히 법인 이전, 세금, 투자 계약 구조 같은 행정적·실무적 사안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회사가 어디서 시작하느냐는 인재 채용, 자금 조달, 고객 접근성, 심지어 회사의 정체성까지 결정한다. 이것이 사업 성공의 유일한 변수는 아니지만 직접 경험하고 주변 사례를 관찰하며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회사는 시장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AI 기반 미디어 번역 회사 '엑스엘에이트(XL8)'를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하고, 영업 조직을 남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인근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주요 고객사의 약 30%는 본사가, 약 40%는 가장 큰 지사가 할리우드 근처에 있었다. 덕분에 고객사를 직접 방문해 요구사항을 듣는 일이 쉬웠다. 필요할 때는 엔지니어링 팀 전체가 고객사를 찾아가 세미나를 진행하고 당일 복귀한 적도 있었다.

고객과의 물리적 거리는 생각보다 중요했다. 고객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이동 시간이 짧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를 더 빠르게 이해하고, 더 빠르게 제품에 반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흐름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호주의 캔바, 중국 출신 에릭 위안이 세운 줌, 아일랜드 형제의 스트라이프 모두 미국을 '시장이 가장 빠르게 확장되는 발판'으로 삼았다.

중요한 사실은 '글로벌=미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핵심은 반대다. 글로벌 창업에서 중요한 것은 본사를 어디에 두느냐가 아니라, 고객이 어디에 있고 시장이 어디에서 형성되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XL8의 경우 최근에는 컨퍼런스 및 행사를 위한 실시간 AI 통역을 제공하며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사용이 크게 늘었고 회사의 무게중심이 아시아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과거 한국 스타트업의 공식은 명확했다. 한국에서 제품을 검증한 후 미국으로 진출한다. 이제 그 공식은 흔들리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스타트업이 창업 첫날부터 글로벌을 전제로 시장을 설계한다. 다시 말하지만 회사는 시장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글로벌은 더 이상 나중에 가는 단계가 아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문제다. 결국 본사 위치는 전략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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