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해운업계의 '순망치한'

오상헌 기자
2016.06.22 06:24

"국적 선사 1곳이 남미 노선을 철수했던 적이 있어요. 당시 200달러 하던 운임이 2000달러로 10배나 올랐습니다. 국적 해운사가 없으니 국내 화주들의 비용 부담이 커진거죠. 국내 대기업 입장에서도 국적 선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지난 17일 경기도 양평 현대종합연수원에서 열린 '2016년도 한국선주협회 사장단 연찬회'.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가 국내 대기업(화주)과 국적 선사의 '상생' 필요성을 강조하며 들려준 일화다.

해운업계에서 국내 대기업 화주들은 '갑'으로 통한다. 삼성SDS(삼성그룹) 현대글로비스(현대차그룹) 범한판토스(LG그룹) 한익스프레스(한화그룹) 등 굴지의 대기업 물류 자회사들이다. 수출입 화물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보니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같은 대형 국적 원양 선사도 대형 화주 앞에선 '을'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그냥 갑이 아니라 '수퍼갑'"이라고 했다.

컨테이너 화주들은 벌크와 달리 달리 해운사와 장기운송계약을 맺는 걸 꺼린다.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화물을 공급해야 해서다. 스팟성 계약을 선호하다보니 비용이 최우선 고려요소다. 국적 선사를 이용하는 경우도 상대적으로 적다. '갑을관계'가 부쩍 심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최근 만난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국적 선사의 유동성 위기로 '법정관리' 얘기가 나온 후 국내 화주들의 '운임깎기'나 '부당요구'가 부쩍 늘었다고 한결같이 토로했다. 이윤재 한국선주협회장이 연찬회에서 당면 현안으로 꼽은 것도 해외 선사로 갈아타는 국내 대형 화주들의 이탈현상이었다. 자국 해운사에 일감을 먼저 주는 일본이나 중국 화주와 달리 한국에서 '상생'은 먼 얘기란 것이다.

물론 국내 대기업이 국적 선사에 일감을 몰아줘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선사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운임을 후려치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다행히 국내 대기업 화주들은 지난 13일 해운업계와 함께 하는 '상생협의체' 구성을 위한 테이블에 처음으로 앉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했다. '입술(선사)'이 없으면 '이(화주)'가 시리게 마련이라는 걸 대기업 화주들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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