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오피스'는 많은 이들에게 낯선 개념이다. 극소수의 최상위 부자와 그 집안이 자신들의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하는 개인 자산 운용사이기 때문이다. 국내 패밀리 오피스는 최소 운용 규모가 1000억 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런 패밀리 오피스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늘고 있다. 혁신적인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로 유니콘 기업(자산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창업 기업)을 만들어낸 기업인 등 국내에서도 고액 자산가가 증가하고 있어서다. 특히 이러한 부호들의 경우 세금, 상속 등의 문제에 있어 자산관리가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아 전문적인 관리를 필요로 한다.
패밀리 오피스 관련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라피 아밋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석좌교수는 패밀리 오피스가 단순히 자산만 관리해서는 안 되며 부호들의 행복과 건강 등 삶 전반에 걸쳐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밋 교수는 '와튼 글로벌 패밀리 얼라이언스 (Wharton Global Family Alliance)'를 설립하고 가족 경영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리더십, 사회적 기여를 연구하며 자문하고 있다.
최근 아밋 교수가 한국을 찾아 이준만 서울대학교 교수, 유효상 유니콘 경영경제연구원장, 박영숙 플레시먼힐러드코리아 대표와 바람직한 패밀리 오피스 설립과 운영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이=패밀리 오피스가 자산 관리 이상의 역할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밋=패밀리 오피스의 임무는 부호 가문의 자산을 관리함에 있어서 재정 번영과 더불어 가족의 유대, 화합, 행복, 건강을 지원하는 것이다.
자산을 관리하면서 더 나은 투자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부를 창출하고 다음 세대로 부를 승계·이전하는 것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켜 나가기를 원하는 가문의 가치, 문화, 규범, 아이덴티티, 가족의 연대를 도모하는 프로그램 운영, 교육, 자선 활동과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한다.
여러 세대로 이루어진 패밀리 비즈니스에서는 자연스럽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이견이 발생하며 갈등 상황의 발생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가문의 화합과 결속이 없이는 재정적인 번영이 어렵다. 패밀리 오피스에서 가문의 화합과 결속을 유지시키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이를 위해선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상황에 대해 미리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 간 커뮤니케이션과 조정 역할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이 필수다.
박=한국의 유류분 청구 소송 건수가 한 해에 1000건이 넘는다. 1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상장사가 많고 계열사들도 상장사와 비상장사가 혼합돼 있어 구성원 간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면 경영진, 이사회, 임직원, 일반 주주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패밀리 비즈니스 내 구성원 간 이혼, 경영 승계, 지분 분할, 계열 분리 과정 등 갈등이 늘어나고 있는데 패밀리 오피스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아밋=패밀리 오피스는 '가문의 헌장' 또는 '가문의 헌법'을 통해 가문과 기업의 역사, 구성원들이 소중히 생각해야 하는 가치, 비전, 미션,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 의사결정 구조, 원칙, 행동 양식에 대해 정리해 놓고, 꾸준히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가족 총회, 위원회, 워크숍, 뉴스레터 등을 통해 조율하고 업데이트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패밀리 비즈니스의 승계 과정은 물론 투자, 자산관리, M&A(인수합병), 배당, 사회적 책임 활동 등 일상적인 경영 활동에서의 의사 결정에서 가족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소통을 지원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며 이해 당사자들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충분히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고 공통의 목표를 상기하며 객관적으로 조율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최근 패밀리 오피스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관심 사안은 무엇인가?
아밋=와튼 글로벌 패밀리 얼라이언스는 2004년부터 격년으로 패밀리 오피스 벤치마킹 리서치를 진행해 왔다. 미주,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의 195개 패밀리 오피스를 대상으로 2022년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인플레이션,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보였다. 또 복잡해지는 세무, 지배 구조, 길어진 수명, 가문 내 이견, 다양해진 외부 이슈 관리 및 대응 필요성 등으로 인해 성과와 평판을 갖춘 입체적 시각의 외부 자문단 서비스가 점점 필수가 돼 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세대 간 인식 차이도 드러났다. 기존 세대는 디지털 활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MZ세대는 지속가능성과 환경, 사회적 책임 등을 중요시하고, ESG(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 구조)와 임팩트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 세대 간 의견 조율을 위한 소통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유=글로벌 패밀리 오피스가 자산의 50%를 해외에 투자한다고 하는데 한국이 패밀리 오피스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을까?
아밋=한국은 신규 자본을 유치하기 전에 먼저 한국의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세제 정책(환경)의 전면적인 개선이 요구된다. 지정학, 지경학적 상황에서 한국, 일본에 대한 글로벌 패밀리 오피스의 투자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데, 싱가포르와 홍콩처럼 적극적으로 패밀리 오피스 설립 촉진을 위한 세금 혜택과 신탁 제도, 전문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를 하지 않으면 신규 투자 유입은 어렵다. 정치권에서 부의 대물림, 기업에 대한 반기업 정서의 눈치를 보느라 상속, 증여세를 손보지 못하는 것으로 들었다. 세제 개혁으로 해외 신규 자본을 유입해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정치인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글로벌 상식이다.
이=여러 세대를 거쳐 장기적인 번영을 보이는 좋은 거버넌스란 무엇인가?
아밋=좋은 거버넌스란 범 가족, 가문의 여러 세대가 함께 공유한 가치, 믿음 목표 등에 대해 자주 그리고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합의를 통해 함께 발전시키는 제도와 절차로써 이를 기반으로 가문 차원에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갈등을 해소하는 환경을 뜻한다. 아울러 좋은 거버넌스는 출구 정책, 유동성 정책, 배당 정책 등을 포함해야 한다. 가문의 특정 구성원이 비즈니스에서 빠지고 싶다고 했을 때, 유동자금 확보를 위해 가진 지분의 일부를 매각하려고 할 때, 법 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족 안에서 원만한 해결을 이루기 위해서다. 매각과 청산이 가능한 오너십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패밀리 오피스 설립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조언은?
아밋=패밀리 오피스의 설립 목적은 가문의 금융 자산뿐 아니라 패밀리의 웰빙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가족을 묶어 주는 소중한 가치와 목표를 충분히 되짚어 보고 가족이나 가문마다 독특한 고유의 역사와 전통, 유산이 있음을 이해하고 중요한 순간에 어떤 기준을 갖고 의사결정을 할 것인지 가문의 헌장 등을 통해 합의를 이룰 것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