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사태가 4주차에 접어들면서 산업계의 시름이 더욱 깊어진다. 특히 '수급대란' 공포가 산업의 근간인 정유·화학업계를 뒤덮었다. 일단 기업들은 대체수급처 발굴과 가동률 조정, 구조조정 실시 등 가용수단을 총동원하는 모습이다.
2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수입되는 원유의 65%는 중동과 이란 사이에 위치한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다. 이 해협은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 이후 통항이 사실상 불가하다. 일단 정유업계에선 4월까지는 최대한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통상 정유사들은 4~5주분의 원유재고를 확보하고 중동 외 북미·호주 등 물량은 정상적으로 국내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확보한 총 2400만배럴의 원유는 국내에서 10일 내외 활용이 가능하다.
에쓰오일은 호르무즈해협 반대편의 홍해 연안 얀부항을 활용하는 등 대체수급처 확보도 꾸준히 추진 중이다. 정유사들은 미국 등지에서 단기물량을 확보하는 카드 역시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한시적으로 제재를 완화해준 러시아산 원유의 경우 기대감이 크지는 않다. 우크라이나전쟁 직전에도 러시아산 원유수입 비중은 5%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는 이란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을 경계한다. 전쟁 이후 휘발유와 경유 국제가가 각각 60%, 100% 이상 상승했지만 최고가격제 시행영향 등으로 정유사 공급가는 불과 약 11%, 22% 오른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별도로 정부는 '수출제한' 조치까지 검토 중이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국내에서의 손해를 수출을 통해 만회하려는 시도조차 여의치 않게 된 셈이다.
정유사들은 "정부의 입장에 공감하며 긴밀히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고통분담을 정유사에만 떠넘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압박 일변도의 정책이 지속되면 정유사들이 가동률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익률 방어에 나설 것이고 석유제품 공급이 줄면 그 피해를 국민과 다른 기업이 볼 수밖에 없어서다.
화학업계가 처한 현실은 더 가혹하다. 국내에 수입되는 나프타의 54%가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데 국내에 남은 물량은 약 2주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프타는 각종 석유화학제품의 기본원료가 되는 '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급 불투명성은 곧 산업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 실제로 LG화학과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화학 대기업들이 잇따라 고객사들에 제품공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불가항력' 가능성을 통보했다.
이에 화학업계는 전열 재정비에 나선 상태다. 지난 20일 여천NCC·DL케미칼·한화솔루션·롯데케미칼 4사는 '여수 1호 프로젝트' 사업재편 계획서 최종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앞서 결정된 롯데케미칼의 대산 NCC(나프타분해설비) 가동중단까지 합쳐 약 250만톤의 에틸렌 생산감축이 이뤄질 수 있게 됐다. 업황부진 장기화에 이란사태에 따른 수급불안까지 겹치면서 선제적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다만 수급불안과 NCC 구조조정 진행으로 화학사들의 마진율이 개선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우제 KB증권 연구원은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세계 에틸렌 공급이 31% 감소할 것으로 계산하는데 봉쇄가 지속되면 5월부터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라며 "4월부터는 '가격'이 아닌 '확보'의 문제"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