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가격인상이 메모리를 넘어 비메모리 영역으로 확산한다. 실제로 원재료가와 에너지가격, 물류비 상승압박에 글로벌 반도체기업들이 잇따라 공급가격을 올린다. 자동차·가전·산업장비 등 전방산업 전반에서 '칩플레이션'(Chipflation·반도체발 물가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이하 ST마이크로)는 최근 고객사에 다음달 26일부터 주요 제품군의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ST마이크로는 차량·센서·전력제어 등에 쓰이는 반도체를 생산하며 애플과 테슬라, 엔비디아, 스페이스X 등 다양한 기업을 고객사로 뒀다.
ST마이크로는 공지서한에서 "원가상승과 함께 원자재 공급유지를 위한 계약조건이 강화됐다"며 "에너지가격과 물류비용 상승뿐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외주 패키징·테스트(OSAT) 비용까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업체도 상황은 비슷하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점유율 2위인 NXP도 다음달부터 일부 제품가격을 인상하기로 했다. 원자재가와 인건비, 물류비 등 전방위적인 비용상승이 배경이다. 인피니온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역시 오는 4월 가격인상을 고객사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기업이 생산하는 반도체는 차량용 MCU(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 전력반도체, 센서 등 산업 전반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특히 인피니온과 NXP, ST마이크로, TI 등은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공급망 내 영향력이 큰 기업들이 동시에 가격인상에 나선 셈이다. 여기에다 AI(인공지능) 관련 반도체 수요와 생산 증가로 소재가격이 상승 중이다. 반도체 기판 핵심소재인 CCL(동박적층판)을 생산하는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은 다음달 1일부터 제품가격을 최대 30% 인상할 예정이다. 지난해 두산 전자BG의 CCL 평균판매가격은 전년보다 17.8% 상승했다.
소재 확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업체들이 추가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물량을 우선 배정받기 위해 비용을 더 내는 방식이다. 아울러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불안으로 에너지비와 물류비까지 상승하면서 반도체 제조원가는 전방위 압박을 받는 모습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가격상승은 산업 전반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데이터센터 전력장비를 비롯해 산업용 인버터,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서다. 특히 비메모리는 맞춤형 설계 비중이 높아 단기간에 공급처를 변경하기도 어렵다.
자동차산업의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시장분석업체 욜그룹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차량 1대에 탑재되는 반도체 비용은 약 600달러 수준이었다. 전기차에는 이보다 많은 반도체가 필요하다. 차량용 반도체 가격이 10%만 상승해도 완성차업체 입장에서는 수십만 원의 원가부담이 추가된다.
이미 메모리 가격상승의 영향은 소비자제품 시장에서 현실화했다. 최근 6개월간 범용 D램 가격이 약 5배 급등하면서 이를 탑재한 PC·노트북·스마트폰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비메모리 가격상승은 이같은 칩플레이션을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반도체업체들이 비용상승을 일정 부분 흡수해왔지만 이제는 가격에 반영하는 국면으로 전환됐다"며 "메모리에 이어 비메모리까지 가격인상이 확산하면 산업 전반의 원가구조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