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LPG(액화석유가스)를 활용한 기초유분 생산 확대에 나선 것은 그만큼 '석유화학의 쌀' 나프타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직후 막힌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다. 국내에 수입되는 나프타의 54%가 그동안 이 해협을 통과해온 점을 고려할 때 석유화학업계 입장에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가 수차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종전 타이밍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점도 불확실성을 키우는 원인이다.
국내 화학사들은 일단 이달말까지 활용 가능한 나프타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나프타를 적재하고 출발한 선박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 한국에 당도하기까지 3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란 사태가 끝난다고 해도 4월말~5월초에는 일정 수준의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중동 대체 물량 확보 역시 여의치 않다. 미국의 제재 해제로 LG화학이 러시아산 나프타 2만7000톤을 확보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이는 3~4일치 물량에 불과하다. 김동춘 LG화학 사장도 지난달 31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추가 구입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와 별도로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인도에 나프타 긴급 수출 확대를 요청하는 등 민관이 나프타 확보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화학사들은 생산라인 가동률 조정과 일부 시설 셧다운 등을 동원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현재 가동률은 60~70% 수준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50~60%선이 설비 효율을 위한 마지노선으로 거론된다. 가동률이 현재 수준보다 더 떨어진다면 공장 운영비 부담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제품 공급이 줄어들면 전자·자동차·유통 등 전방산업 전 분야가 타격을 받게 된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나프타 대신 LPG를 활용한 기초유분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화학사들이 가동률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특히 LPG 수요가 감소하는 여름철이 다가오고 있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는 그동안 하절기에는 LPG를 일정 수준 나프타와 섞어 기초유분을 만들어왔는데, 이 시점을 앞당긴 것이다.
LPG의 경우 북미 수입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데다 전쟁 발발 후에는 나프타 대비 가격적 이점 역시 더욱 커졌다. LPG를 최대한 활용해 에틸렌·프로필렌 생산량만 유지할 수 있어도 석유화학업계 입장에서는 일종의 시간 벌기가 가능해진다. 다만 에틸렌·프로필렌 외에 부타디엔·프로필렌·벤젠·자일렌 등 다양한 기초유분까지 만들기 위해서는 나프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나프타 공급망이 회복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LPG 활용 비율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며 "민관이 힘을 합쳐 나프타 수급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어야 중장기적인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