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반도체(이하 메모리) 산업의 약점으로 꼽혀온 '사이클' 구조가 변화 조짐을 보인다. 구속력 높은 장기계약이 확산하면서 수주형 산업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열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대형고객과 계약을 확대하며 중장기 성장기반을 강화한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샌디스크는 지난달 말에 열린 지난 분기(2026년 1월 초~4월 초) 실적발표에서 총 5건의 장기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지난 분기 3건을 체결했고 이후 추가로 2건을 더 맺었다. 최대 5년간 물량·가격을 확정하는 구조다. 샌디스크는 글로벌 5위(점유율 12.8%)의 낸드플래시 기업이다.
장기계약 확대는 AI(인공지능) 산업확산에 따른 수요구조 변화와 맞물린다. 최근 메모리시장은 공급을 웃도는 수요로 품귀현상이 심화하면서 고객사들이 가격보다 물량확보를 우선한다. 이에 메모리 제조사와 주요 고객사 간에 3~5년 단위 LTA(장기공급계약)가 확산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일부 고객사와 계약을 했거나 협의를 진행 중이다.
LTA 자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과거에도 공급부족으로 가격이 급등한 경우 메모리업체들은 가격을 고정하기 위해 LTA를 추진해왔다. 이에 일부에서는 LTA를 '가격고점 신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장기계약은 과거와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계약구조 자체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상호신뢰 기반의 기존 공급계약과 달리 상당한 구속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 역시 "과거 LTA와 달리 다양한 방식과 구조적 대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급금, 최소매출 보장, 재무적 보증 등 과거에는 없던 장치가 포함되면서 계약의 강도가 한층 세졌다.
샌디스크 사례는 이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회사는 지난 분기에 체결한 3건의 계약만으로 420억달러(약 62조원) 규모의 최소매출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계약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도 강화됐다. 각 계약에는 고객이 구매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재무보증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일부 계약에서는 선급금도 지급됐다.
가격구조 역시 기존과 차별화됐다. 단기적으로는 고정가격 비중을 높여 실적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는 시장가격을 반영해 가격 상승시 추가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반대로 가격이 하락할 경우에는 고객사도 일정 수준의 혜택을 공유한다.
최근의 LTA 구조는 메모리산업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던 '사이클'을 완화할 수 있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메모리시장은 가격변동성이 커 실적예측이 어렵고 이에 따라 기업가치가 할인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삼성전자는 반도체부문에서 2021년과 2022년 각각 29조2000억원, 23조8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2023년에는 14조9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시장에서 기대감도 커졌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대형 IT기업)들이 AI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면서 메모리 수요의 장기 성장성이 더욱 부각됐기 때문이다. 실제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 추정치를 317조원, SK하이닉스는 247조원 수준으로 제시하며 기대치를 높였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처럼 하락기에 영업이익이 급감하거나 손실을 보는 구조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