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곳 만들자 '17조' 투자 왔다…TSMC, 독일 찍은 이유

드레스덴·베를린(독일)=권다희 기자
2026.05.10 16:45

[산업전환 돌파구, 독일에서 찾다]<1>반도체 특구 성공법①학교·보육..정주 여건을 잡아라

[편집자주] 인공지능(AI) 전환(AX)·녹색 전환(GX)으로 요약되는 산업 변환기이자 '경제안보'로 대표되는 지경학적 전략이 주목받는 시대다. 전통 제조업 강국인 독일은 어떻게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부근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ESMC 건설현장/사진=권다희 기자

독일 남동부 작센주 주도(州都) 드레스덴 인근 아우토반 13호선(A13)을 달리다 드레스덴 공항 인근에 이르자 지평선을 메운 거대한 기중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인피니온·보쉬·NXP 등 유럽 반도체 기업들과 합작한 ESMC의 반도체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 건설 현장이다. ESMC는 이 곳에 100억 유로(약 17조 원)를 투입해 월 4만 장의 300mm(12인치) 웨이퍼 생산 능력을 갖춘 팹을 구축한다. 올해 공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양산하는 게 목표다.

TSMC가 첫 유럽 진출지로 이 곳을 낙점한 데엔 유럽연합(EU)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이 마중물 역할을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EU 내 입지 중 왜 독일이었고, 독일 중에서도 16개 주 중 하나인 작센이었는지를 살피는 과정은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작센주 반도체 생태계(실리콘작센) 투자 및 확장 역사/그래픽=이지혜

TSMC의 첫 유럽 공장…유치 핵심 '산업 클러스터'

지난달 21일 작센주 총리 집무청사에서 만난 토마스 호른 작센주 경제개발공사(WFS) 대표는 TSMC 유치의 핵심 요인을 묻자 "이미 형성된 클러스터"를 첫손에 꼽았다. 그는 "이곳에는 공급업체· 협력사·숙련된 인력이 이미 갖춰져 있다"며 "다른 지역을 선택하면 생태계를 처음부터 구축해야 하는 만큼 기업으로선 이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요인"이라 했다.

ESMC가 둥지를 튼 '실리콘 작센(Silicon Saxony)'은 유럽 최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반도체·센서·집적회로 등 초소형 전자부품 기술) 클러스터다. 전력·차량 반도체 등 유럽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 3개 중 1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1960년대 동독 시절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연구 거점으로 기반을 닦았고, 독일 통일 후인 1994년·1995년 지멘스 반도체 부문(현 인피니온)과 AMD(현 글로벌파운드리)가 생산 거점을 세우며 입지가 굳건해졌다. 현재 인피니온·글로벌파운드리·보쉬 등 글로벌 기업들과 공급망 기업들을 포함한 약 3650개 기업, 연구소·대학들이 밀집해 있다. 관련 종사자는 8만1000여 명이다.

인위적·단기적으로 만든 특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유기적으로 형성된 산업 생태계는 이 곳 기업들의 경쟁력을 배가시켰다. 각 기업과 기업·기업과 연구기관들이 교류하며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통해서다. 같은 날 인피니온 드레스덴 사업장에서 만난 우베 가블러 인피니온 드레스덴 독일 연구혁신 네트워크 총괄은 "연구개발 인재·대학과의 연결 측면에서 실리콘 작센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했다.

캐롤라 다리 인근에서 바라본 독일 드레스덴 구시가지 전경. 엘베강 너머로 아우구스투스 다리와 드레스덴 대성당(카톨릭 궁정교회) 등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펼쳐져 있다. 유럽 최대급 반도체 클러스터인 '실리콘 작센'이 차로 약 10여 분 거리에 자리해 있어, 첨단 산업과 문화·예술 도시의 면모가 공존하는 드레스덴의 정주 환경을 보여준다./사진= 권다희 기자

"결국 오는 건 사람…국제학교·주거환경 중요"

작센주는 오랜 투자유치 경험을 통해 해당 기업 구성원들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환경 구축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도 간파했다. 다비드 미헬 작센주 총리실 국제관계·개발협력 부서장은 "결국 오는 것은 사람"이라며 "이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작센주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는 기반시설을 강조한다. 여성들의 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보육과 교육 시스템에 투자해 온 배경이다. 단순히 공장 부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전세계에서 온 인재들이 가족과 함께 뿌리 내릴 수 있는 기반을 주정부 차원에서 보장한다는 의미다. 문화적 기반·관광 자원도 정주 여건의 핵심 요소로 적극 활용한다. 가족·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들이 지척에 있다는 게 비즈니스 관점에서 강력한 유인책이 된다는 관점에서다.

미헬 부서장은 "이 곳에 사는 이들이 음악·예술·박물관 등 문화적 요소들에 잘 연결될 수 있게 하고, 자녀들이 국제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주거 문제가 해결된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며 "우리가 말하는 생태계는 기업과 연구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생활환경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클러스터를 주재원과 그 가족들이 이직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로 보는 관점도 이런 시각을 드러낸다. 호른 대표는 "다른 나라로 이주를 결정할 때는 보통 현재 소속된 회사에 의존하게 되지만 그 곳에 영원히 머물지는 알 수 없다"며 "하지만 클러스터가 있는 드레스덴에서는 다른 기업, 연구소나 공급망 기업으로 이동할 기회가 있고, 이는 직원들 또는 그들의 가족이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매력적 요인을 더한다"고 했다.

엘베강 너머로 펼쳐진 독일 드레스덴 구시가지 스카이라인. 중앙의 성모교회(Frauenkirche)를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 건축물들이 이어져 있다. 작센주 정부는 실리콘 작센 주요 기업들과 차로 10분 안팎 거리에 위치한 이 역사적 도심을 드레스덴의 핵심 정주 경쟁력 중 하나로 꼽는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와 문화·예술 인프라가 가까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점에서다./사진=권다희 기자

이 같은 작센주 정부의 접근은 한국이 지역균형 발전을 실현하는 데 현실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국내 기업들이 수도권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꺼리는 핵심 이유가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정주 여건의 미비라는 점에서다.

김승희 KEI컨설팅 매니저는 "국내 기업들이 지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기 어려운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건 인력이 없다는 것"이라며 "우수한 인력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단순한 부지 지원을 넘어, 인재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정주 인프라 구축에 정부와 지자체가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작센주 주요 산업별 매출 비중, 작센주 연도별 수출 이정표/그래픽=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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