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통해 약 40조원의 '시설투자 실탄'을 확보하고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낸다. '없어서 못 파는' 메모리 반도체(메모리) 공급난이 더 심해질 조짐을 보이자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도 대규모 투자에 나서면서 '메모리 빅3'의 증설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통해 조달한 총 265억700만 달러(약 40조원)는 14일 회사에 납입돼 투자에 활용된다. 확보한 자금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공장) 건설 △청주 P&T7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 구축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 등 시설 투자에 투입된다.
이는 AI(인공지능) 메모리 시장 주도권 강화를 위한 선제적 투자다. AI 확산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비롯한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능력 확보 자체가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메모리 업계 1, 3위인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도 생산능력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에 지어질 1호 팹의 가동 목표를 기존 계획보다 2년 앞당긴 2029년 10월쯤으로 잡았다.
역시 당초 계획보다 6개월가량 앞당겨 평택 P4(4공장)도 연내 완전 가동할 예정이다.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한동안 중단됐던 P5(5공장)도 지난 4월 본공사에 착수했다. P5는 2028년 Ph1(페이즈1), 2029년 Ph2(페이즈2) 가동이 예상된다. P5가 완공되면 삼성전자의 메모리 생산능력은 300㎜ 웨이퍼 기준 월 65만장에서 135만장으로 두 배 이상 확대될 전망이다. 용인과 평택 등에 추가 투자 규모는 2030조원에 달한다.
첨단 패키징 투자도 확대한다. 삼성전자는 천안·온양 캠퍼스에 총 56조원을 투자해 HBM 패키징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광주에 총 80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팹 4기를 신설하는 계획도 발표했다.
마이크론은 지난 9일(현지시간) 2035년까지 미국 내 투자 규모를 2500억 달러(약 375조원)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기존에 발표한 뉴욕·아이다호·버지니아 팹 확장 계획을 포함한 규모다. 최근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HBM 등 AI 메모리 생산을 위한 신규 제조동 기공식을 개최했다. 2028년 양산을 목표로 총 1조5000억엔(약 14조원)을 투자해 신규 제조동을 건설할 계획이다.
AI 전환이 거의 모든 산업에서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과거 PC나 스마트폰 등 일부 제품의 상승 하락 곡선에 기댔던 '반도체 사이클'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2030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가 1조5000억 달러(약 2269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가운데 AI 반도체는 전체 시장의 약 50%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7000억~9000억 달러 수준으로 예상되는 점을 고려하면 5년도 채 안돼 2배로 커진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적어도 수년 이상 심각한 반도체 공급 부족이 계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현지에서 외신에 출연해 "빅테크 파트너들을 만나보니 5년 안에 생산능력을 2배로 늘리겠다는 SK하이닉스의 계획에도 '그걸로 부족하다',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실제 주요 고객사들은 메모리 제조사와 3~5년 장기공급계약(LTA)을 맺고 있다. 일부 계약에는 약정 물량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비용을 지급하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조항이 포함된다. 이처럼 안정적인 수요가 장기간 확보된 상황에서 '신속한 투자→빠른 생산능력 확대→시장지배력 유지와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역시 최근 연이은 투자발표회에서 "지금은 세계 경제의 판이 흔들리는 승부의 시간"이라며 투자 속도전을 강조했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최근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LTA는) 장기 수요에 대한 가시성을 높여 설비투자와 R&D(연구개발) 투자를 보다 자신 있게 집행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산업은 업황 변동성이 큰 특성상 투자에 보수적이었지만 AI 확산으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시장 환경이 달라졌다"며 "LTA 확산으로 중장기 수요에 대한 가시성이 높아지면서 생산능력 확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