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나스닥 ADR(미국주식예탁증서) 상장을 계기로 미국 자본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현지 투자 전략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에 대한 메모리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가운데 메모리 공급 부족 심화로 신규 투자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이미 올초부터 미국과 일본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신규 생산 거점 구축을 검토해왔다. 특히 AI 시대를 이끄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집중된 미국에 팹(공장)을 짓는 방안이 다각도로 고려됐다. SK하이닉스는 텍사스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마련 중인 삼성전자와 달리, 중국의 우시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해외 거점이 없는 상황이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나스닥 ADR 상장을 통해 조달한 265억700만 달러(약 40조원)는 일단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과 청주 P&T7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 등 국내 생산능력 확대에 우선 투입될 계획이지만 미국 투자 확대에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7000만 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해 HBM(고대역폭메모리) 첨단 패키징 시설과 연구개발(R&D)센터를 구축 중이다. 목표 가동 시점은 2028년 하반기다. 업계에서는 단기적으로 기존 인디애나 투자 확대에 무게가 실리지만 추가 생산시설 투자도 발표될 수 있다고 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나스닥 상장 이후 국내 특파원단과 간담회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빅테크 고객사마다 칩을 더 달라고 아우성"이라며 "우리가 생산 능력을 가속화해도 수요를 따라잡기 힘든 제약 조건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가 있다면 미국이든 전 세계 어디든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외신에 출연해서도 "실무팀이 현재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적합한 입지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반도체 현지 생산을 강조하는 미국 정부의 공급망 재편 기조와도 맞닿는다. 미국의 지원을 최대한 받아낼 수 있는 방법과 시점으로 전략적 투자 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앞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의 뉴욕주 클레이타운 반도체 공장 기공 행사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언급하며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를 촉구했다. 러트닉 장관은 "나는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이제 다른 기업 등도 질투가 날 것이고 결국 뒤따라오게 될 것"이라며 "우리는 미국의 훌륭한 기업과 지식재산권에 투자하는 이들을 보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말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를 미국에서 담당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수요가 지속적으로 급증하는 시장 환경도 추가 투자에 힘을 실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범용 D램 가격은 전 분기 대비 58~63%, 낸드플래시는 55~60% 상승했다. 3분기에도 D램은 13~18%, 낸드플래시는 10~15% 추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메모리 가격 강세가 이어지면서 주요국 간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패키징뿐 아니라 AI 메모리 공급망 전체를 미국 안에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며 "SK하이닉스도 기존 인디애나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은 물론 고객사 수요와 보조금, 투자 효율성이 맞는다면 중장기적으로 추가 투자도 충분히 선택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