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머니즘의 희망은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화면 속의 존재였던 AI가 이제 몸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자동차 생산 라인을 개조해 휴머노이드 옵티머스의 대량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는 현대자동차 공장에 투입되어 수십 개의 관절 자유도로 부품을 나르며, 배터리를 스스로 갈아 끼우고 있다. 피규어의 로봇은 BMW 공장에서, 어질리티의 디지트는 토요타의 물류 창고에서 일한다. 엔비디아는 휴머노이드 전용 파운데이션 모델을 내놓으며 이 몸들에 공통의 두뇌를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휴머노이드는 '잠들지 않는 노동자', '음식을 먹지 않는 노동자', '휴식이 필요 없는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휴머노이드의 가치를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한 휴머노이드의 가치는 인간의 세계에 바로 물리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접속은 노동 시장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전체 노동 시간의 절반 이상이 자동화 가능한 작업 범주에 속한다는 분석이 있고, 산업용 로봇의 노출도가 높아질수록 노동자의 생애 커리어 가치가 잠식된다는 연구도 있다.
휴머노이드를 통한 이익이 자본가에게 집중되면, 중산층이 붕괴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로봇세 내지 초과이득세, 돌봄 경제로의 재투자, 기본소득, AI 회사 주식에 대한 국부펀드 소유를 포함한 다양한 재분배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휴머노이드의 노동 대체에 따른 사회적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가 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더 살펴보지 않겠다.
이를 넘어 변화의 거시적 의미를 문명사적 시야에서 생각해보자. 경제학자 케인스는 한 세기 전, 생산성의 향상 덕분에 손자 세대는 주 15시간만 일하게 되리라 내다보았다. 예언은 절반만 맞았다. 생산성은 그의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자랐지만 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 어긋남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의미에 있었다. 근대 사회는 임금노동을 생계의 수단을 넘어 존엄의 근거이자 정체성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가 '당신은 누구입니까'의 동의어가 된 세계에서, 인간은 일할 필요가 줄어도 일을 놓지 못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층위로 구분했다. 생존을 위해 반복되고 소모되는 노동, 세계에 지속하는 것을 남기는 작업, 그리고 타인과 더불어 말하고 행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 구분을 빌리면 휴머노이드에게 이관되는 것의 정체가 선명해진다. 기계가 가져가는 것은 첫 번째 층위, 곧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복해 온 노동이다. 세계에 무언가를 남기는 창조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은 이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수혜자다. 생존의 노동이 기계의 몫이 될 때, 인간은 활동을 잃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활동의 무게중심을 옮길 자유를 얻는다.
역사는 이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이 철학과 정치와 예술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 노동이라는 불의한 토대 위에서였다. 르네상스의 걸작들 뒤에는 이름 없는 이들의 고된 손이 있었다. 문명의 꽃은 언제나 누군가의 강요된 노동을 거름으로 삼아 피었다. 휴머노이드가 여는 가능성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어느 인간의 희생 없이 고차원적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착취 없이 유지되는 풍요, 누구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자유 시간을 기대할 수 있다. 지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고통받지 않는 휴머노이드가 인류 문명의 토대를 받칠 때, 고대 그리스 시민의 자유는 소수 시민의 특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도발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인간이 꼭 노동의 중심이어야 하는가. 산업 시대는 인간을 생산의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그 주인공의 자리는 영광이기 이전에 굴레이기도 했다. 컨베이어 벨트 앞의 인간, 과로로 무너지는 인간, 일자리를 잃을까 잠 못 드는 인간을 생각해보자. 생산의 중심 자리를 기계에 내주는 것은 인간의 격하가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 그 굴레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귀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일 수 있다. 존엄의 근거를 고용계약서에서 삶 그 자체로 옮기는 일, 그것이 이 전환기에 인류가 수행해야 할 진짜 과업이다. 새로운 인식은 '일자리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가 아니라 '노동 없이도 존엄한 삶을 우리는 만들 것인가'이다.
물론 노동의 자동화가 곧 인간의 해방을 뜻하지는 않는다. 노예제가 소수 시민에게 자유를 주었듯, 휴머노이드를 통한 노동 자동화도 극소수 자본가에게만 자유를 줄 수 있다. 휴머노이드가 만든 풍요가 임금노동의 상실로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배제다. 휴머노이드 시대의 핵심은 로봇의 성능이 아니라, 로봇이 만든 생산성을 누구의 시간과 존엄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있다.
이권호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강남 구성원 변호사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