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체성까지 위협하고 있다."
날 선 정치권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대기업 규제강화와 복지공약 등을 쏟아내자 당시 경제5단체가 공동성명을 내고 포퓰리즘을 멈추라며 이같이 비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를 두 축으로 하는 우리나라 경제단체들은 이렇듯 주요 국면마다 재계의 목소리를 내왔다. 문재인정부 때는 서슬 퍼런 정권 초였지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중소기업중앙회가 총대를 메고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제 도입에 맞섰다. 2021년 정부가 강력한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했을 때도 경제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지난해만 해도 정부·여당의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 강행처리를 막으려 장외집회까지 불사했다. 집권세력의 일방통행에 제동을 걸면서 기업들을 대변해 적어도 다른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올해 들어 경제단체의 대정부 발언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2월 초 벌어진 대한상의의 '상속세 보도자료' 사건이 분수령이 됐다고 보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의 과도한 세금부담을 지적하기 위해 가져다 쓴 근거에 오류가 있었는데 이를 이재명 대통령이 강하게 질책하면서다. 이 대통령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엑스(X·옛 트위터)에 관련 기사를 올리고 "가짜뉴스 유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며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직격했다.
대한상의는 이후 임원진이 전원 사의를 표명하고 정부의 감사를 받는 등 홍역을 치렀다.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길들이기'로 받아들이는 기류가 강했다. 비록 대한상의가 법률에 설립근거를 둔 법정단체이기는 해도 일부 보도자료 부실 작성에 대해 대통령까지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의 경우 과거 전경련 시절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원죄'로 숨죽여온 지 오래인 터라 대한상의를 통해 재계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발신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실제 정부 정책에 대한 경제단체의 반박이나 유감 표명은 자취를 감췄다. 올해 대한상의가 내놓은 논평과 공식 코멘트는 단 4개에 그쳤고 정부에 반대하는 내용은 없었다. 한경협의 올해 6개 공식 코멘트 중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찾기 어렵다.
경제6단체(대한상의·한경협·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경총·한국중견기업연합회) 공동성명도 마찬가지다. 올해 10개를 발표했는데 정부 정책을 향해서는 지난달 금융위원회의 '지속가능성 공시제도화 추진 방향'에 우려를 나타낸 것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환영'이 주를 이룬다.
현장에서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경제단체가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에는 환영하면서도 정작 이를 위해 기업들이 다급하다고 호소하는 '52시간제 예외'를 요구하지 않고 국내생산세액공제 신설엔 환영하면서도 여기서 제외된 전기차 문제는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1월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이 통과됐을 때도 경제단체는 '환영' 입장만 밝힐 뿐 알맹이로 평가받던 52시간제 논의가 빠진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세액공제 대상에서 전기차가 소외된 것 역시 중국이 무섭게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업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경제6단체는 일제히 '환영'만 했다.
업계 관계자는 "경제단체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니 개별 기업들은 민감한 현안에 각개전투를 해야 하는데 결국 엄청난 부담"이라며 "정부는 경제단체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경제단체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선순환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