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버추얼 아이돌 전성시대
버추얼(Virtual·가상) 아이돌 그룹의 연이은 흥행으로 K팝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한때 실험적이고 생소하게 여겨졌던 버추얼 아이돌은 더 이상 서브컬처(하위문화)가 아니다. 국내 음원차트 정상에 오르는 등 신기록을 세우며 K팝 산업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기세에 힘입어 수많은 버추얼 아이돌이 시장에 진출하면서 K팝 산업은 더욱 확장하고 있다.
◇버추얼 아이돌 전성시대…대형 엔터사도 뛰어들었다
한국 버추얼 아이돌 계보는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에서 시작한다. 당시 아담은 3D 기술과 실제 보컬을 결합한 콘셉트로 인기를 끌며 음료 광고까지 찍었다. 하지만 기술적 한계로 장기 활동에 실패해 점차 잊혀졌다.
일본에는 2007년 보컬로이드 기술을 기반으로 탄생한 '하츠네 미쿠'가 있다. 현재도 홀로그램 콘서트와 굿즈 활동을 이어가는 등 대표적인 버추얼 아이돌로 인기를 끈다.
최근에는 기술 발전으로 버추얼 아이돌이 잇따라 등장하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2023년 데뷔한 5인조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PLAVE)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버추얼 아이돌 시장을 개척했다.
플레이브는 데뷔 약 2년 만에 미니 3집 '칼리고 파트 원'(Caligo Pt.1) 초동(발매 첫 일주일간 판매량) 103만장을 기록했다. 버추얼 아이돌 최초로 100만장을 넘겼다. 지난달 발매한 두 번째 싱글 앨범은 초동 109만장을 돌파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버터'(Butter) 이후 역대 보이그룹 싱글 초동 2위다. 타이틀곡은 아이튠즈 글로벌 7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음반과 음원뿐 아니라 공연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냈다. 지난 8월 서울 올림픽공원 KSPO 돔(옛 체조경기장)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지난달에는 K팝 정상급 아티스트의 상징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 입성했다. 이 역시 버추얼 아이돌 최초다.
6인조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이세돌)은 국내 버추얼 아이돌 최초로 빌보드 한국 차트 3위에 올랐다. 7인조 버추얼 보이그룹 '스킨즈'는 일본 패션 이커머스 플랫폼의 공식 앰버서더로 발탁되며 영향력을 입증했다.
버추얼 아이돌 성공 사례에 대형 기획사들도 출사표를 던졌다.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걸그룹 에스파 세계관 속 조력자 캐릭터인 '나이비스'를 선보였다. 하이브 자회사 수퍼톤은 버추얼 걸그룹 '신디에잇'을 공개했다. JYP엔터테인먼트도 지난 9월 테크 비즈니스 자회사 블루개러지와 AI 아티스트 제작 소식을 전했다.
버추얼 아이돌의 뜨거운 인기에 MBC는 지난 10월 '버추얼 라이브 페스티벌'도 개최했다. 국내 최초로 K팝 가수들과 버추얼 아이돌이 오프라인 무대에 함께 모여 인간과 인공지능(AI) 아티스트가 공존하는 신선한 무대를 선보였다.
◇버추얼 아이돌, 인기 이유는…"달라진 소비층, 줄어든 리스크"
시장조사기관 글로벌 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전 세계 버추얼 아티스트 시장은 2023년 10억8279만달러(약 1조5908억원)에서 2029년 40억4400만달러(약 5조9414억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K팝 시장에 버추얼 아이돌이 자리 잡은 배경으로는 대중문화 주 소비층의 변화와 기술 발전이 꼽힌다. 메타버스 환경에 익숙한 세대는 캐릭터 기반의 버추얼 아이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AI 기술 발전으로 버추얼 아이돌은 점점 사람과 비슷해진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와 달리 소비자 취향이 다변화돼 각자 원하는 콘텐츠를 찾는다"며 "감수성도 달라졌다. 이제는 버추얼 아이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변화들이 버추얼 아이돌을 주류 문화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버추얼 아이돌 제작에 초기 기술 투자 비용이 들지만, 사생활 논란 등 리스크가 거의 없고 24시간 글로벌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획사들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어 향후 시장이 더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버추얼 아이돌은 실체가 없어 스캔들 가능성도 없다. 팬들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이 강점"이라며 "기획사 입장에서도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적어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 발전에 따라 버추얼 아이돌이 더 생생한 모습으로 활동하면서 산업도 확장될 것"이라며 "다만 실제 아이돌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고정 팬층을 대상으로 K팝의 한 영역으로서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정 평론가는 "기획사 입장에서 버추얼 아이돌은 관리가 용이하고 리스크가 적다. 온오프라인 활동 범위도 넓다"며 "소비자들도 이에 호응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더 사실적으로 구현되면서 시장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⑤서브컬처가 지역 관광 살린다
특정 문화나 콘텐츠에 빠져 고액 소비나 여행도 서슴지 않는 '덕후'(오타쿠, 매니아)들이 지역 도시의 최대 손님으로 떠오른다. 관광업계는 우리 시장의 최대 고민거리 중 하나인 수도권 편중 현상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8일 관광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역 도시들은 최근 덕후를 겨냥한 관광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글로벌 인기 그룹 BTS를 활용한 '방탄 투어(여행)'가 대표적이다. 뮤직비디오 촬영지인 주문진(강원 강릉), 새만금 간척지(전북 부안)부터 뷔(대구), RM(경주) 등 멤버의 고향을 방문하는 등 형태도 다양하다. 경주의 한 여행사 대표는 "방탄 투어는 국적과 시기에 관계없이 문의가 꾸준하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먼저 드라마나 영화 속 장소를 찾는 경우도 많다. '태양의 후예', '사랑의 불시착' 등 드라마의 인기로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들며 쏠쏠한 재미를 본 경기도 파주와 강원도 태백, 영월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상품을 출시했다. 대만의 인기 인플루언서 1위로 뽑힌 이다혜 치어리더의 고향을 방문하는 전주 투어는 현지에서 출시되자마자 매진됐다.
'덕후'들을 활용한 관광 마케팅은 세계에서는 이미 뉴노멀이 됐다. 기반시설(인프라)이 없어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몰입한 팬들을 유치할 수 있고 굿즈(기념품), 음식 등 2차 소비로 이어지기도 쉽다. 고투마켓리서치는 '덕후'들이 가장 선호하는 문화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과 연계된 관광 시장 규모를 지난해 12억달러(약 1조 7500억원) 수준으로 평가하며 2035년까지 연평균 8%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덕후 문화를 관광에 가장 잘 접목한 국가는 일본이다. 우시쿠 시는 인구 8만명의 조용한 도시지만 연간 4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애니메이션 '러브라이브' 관련 상품으로 대박을 쳤다. 인구 15만명의 소도시 사야마 시도 지브리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로 연간 수만명 이상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유럽에서는 '덕후'들이 관광지를 점령하는 사례가 매우 흔하다. 비주류로 평가받던 판타지 영화를 주류로 끌어올린 대작 '반지의 제왕'을 촬영한 뉴질랜드의 마타마타는 인구(1만여명)의 수십배에 달하는 팬들이 매년 모여든다. 프랑스의 그라스는 '향수 덕후'들의 성지다. 니스에서도 차로 1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지만 '후각의 천국'으로 불리며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관광업계는 이같은 '덕후 마케팅'이 우리 관광 시장의 새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올해 역대 최고 수준의 관광객을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지만 과반수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지역 소도시는 여전히 혜택이 적다. 한국관광공사의 집계에서는 지난 10월까지 외국인 관광객 소비의 84.5%가 서울과 인천, 경기도에 몰려 있었다.
관광 플랫폼 관계자는 "'팬심'으로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소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른 관광객에 비해 1인당 지출액, 체류 기간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며 "여러 방면에서 우리 문화가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만큼 지역 소도시들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⑥ 일본 33조원·중국 248조원 규모, 한국은?
한때 오타쿠 문화로 지목받았던 서브컬처가 K컬처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떠올랐다. 서브컬처 장르 특유의 충성도 높은 팬덤을 기반으로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오리지널 콘텐츠 분야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여행, 유통 등 IP(지식재산권) 활용이 가능한 산업 분야 전체로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8일 게임 업계에 따르면 국내 서브컬처 게임 시장 규모는 연간 5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게임 고유 매출 뿐만 아니라 IP 확장 상품까지 더하면 경제적 효과는 더 커진다. 앞서 넥슨의 서브컬처 게임 '블루 아카이브'와 GS25가 협업해 출시한 빵은 포장지에 '블루 아카이브' 캐릭터 디자인을 넣었을 뿐인데 출시 47일 만에 200만개 넘게 팔렸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와 넥슨게임즈가 협업해 만든 갤럭시 33만9000원짜리 S24 울트라 액세서리 블루 아카이브 에디션은 2000개 재고가 1분도 안되서 매진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피겨, 애니메이션 굿즈 수집 등 국내 키덜트 시장의 규모는 2021년 1조6000억원대를 돌파했고 향후 최대 11조원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산업연구원은 이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 보고 편의점, 패션, 호텔 등 타 업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례로 세븐일레븐은 지난해 업계 단독으로 슬램덩크 와인을 선보인 바 있다.
서브컬처 종주국인 일본은 이미 서브컬처 시장을 일본 경제를 움직이는 산업의 한 축으로 받아들인다. 일본 서브컬처 전문 분석기관 '오시카츠소우켄'에 따르면 지난해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3조5000억엔(약 33조원) 규모에 달한다. 야노경제연구소는 일본 서브컬처 시장이 2020년부터 5년간 약 50%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IP 확장 분야도 지속 성장한다. 시부야109 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덕질' 대표 아이템인 키링에만 일본인 1인당 평균 3282엔(약 3만원)을 썼다. 덕분에 지난해 일본 완구시장 규모는 1조992억엔(약 10조45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고 이중 키링 시장은 451억엔(약 4290억원)으로 전년 대비 115.3% 성장했다. 자신의 최애 캐릭터를 응원하기 위한 글씨체를 디자인해서 인쇄하거나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인쇄하기 위한 편의점 유료 복사기, 3D 프린터도 큰 인기를 끈다.
서브컬처 시장이 커지다보니, 해당 산업 특화 대출도 생겼다. 일본 이온은행은 서브컬처용 론서비스로 최대 700만엔(약 6700만원)까지 융자를 제공한다. 융자액과 은행심사에 따라 연 3.8~13.5%의 고정금리로 1~ 8년간 융자해준다. 서브컬처 행사 취소 보상 보험도 등장했다. 이벤트나 라이브 공연의 중지·연기, 교통편의 지연 및 결항, 본인 건강 문제 등으로 서브컬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이를 보상해주는 보험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보험 계약 수는 100만건을 돌파했고 매월 계약자의 40%는 재계약자다.
중국에서도 최근 서브컬처 장르가 급부상중이다. 아이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서브컬처 시장은 약 1689억달러(약 248조5500억원) 규모다. AI(인공지능) 생성 콘텐츠의 확산, 메타버스 및 버추얼 아이돌 시장의 활성화 등에 힘입어 급성장하는 모습이다. 중국 정부도 이에 발맞춰 IP 확장 관련 산업 생태계 구축, 재정 지원, 세금 감면, 해외 진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지원한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버추얼 아이돌 뤄톈이는 현재까지 연간 매출 8억5000만달러(약 1조2500억원)를 기록하며 광고 모델, 라이브 공연, 굿즈 판매 등 다양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또 콘텐츠 퍼블리싱 기업 텐센트는 올해 서브컬처 장르 게임으로 약 48억달러(약 7조원), 애니메이션으로 약 24억달러(약 3조5000억원)를 벌어들였다. 굿즈 및 테마파크로는 약 14억달러(약 2조원)를, 웹소설 및 웹툰으로는 약 10억달러(약 1조5000억원)를 벌었다.
삼정KPMG경제연구원은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향한 콘텐츠 다양화 전략' 보고서에서 비주류 콘텐츠의 인기가 급증하는 최근 트렌드를 '롱테일(Long Tail) 법칙'으로 설명했다. 기존 주목 받지 못한 다양한 소수의 상품군이 더욱 큰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이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요즘 각자가 가진 취향에 따라 소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취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더 쉽게 모이고 정보를 교류하다 보니 과거에는 매니아 영역이던 서브컬처 장르가 대중화되고 그러다 보니 산업도 거기에 반응해 계속 발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