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혈맥으로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가 4주차에 접어들면서 국내 식품업계가 '포장재 발(發)' 공급망 쇼크에 직면했다. 라면 봉지, 페트병, 즉석밥 용기 등 포장재 핵심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폭등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공급마저 끊길 위기에 처하면서다. 업계는 사태 장기화로 재고마저 바닥나면 제품 생산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23일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지난 20일 국제 시장에서의 나프타 가격은 톤당 873.74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한 달 전과 비교해 55.03% 폭등한 수치다. 나프타 가격은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 이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원재료 가격을 직접적으로 끌어올린 결과로 풀이된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해 만드는 것으로 비닐이나 플라스틱 용기 등 식품 포장재의 핵심 원료다. 국내 정유사들이 일부 생산하지만 전체 소비량의 약 40~45%를 수입에 의존한다. 특히 국내로 수입되는 나프타의 54%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물류 이동이 차단되자 수급 전반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현재 국내에 남은 나프타 물량은 약 2주치에 불과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심지어 원유 수급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이라 국내 생산분에 기대를 걸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요 식품사들은 지금처럼 나프타 등 원자재 단가가 오르면 협력사를 통한 단가 재협상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협력사를 통해 수급받는 주요 원자재 단가도 이미 공습 이전에 비해 두 자릿수씩 오르는 등 들썩이고 있다. 해당 식품기업 관계자는 "나프타와 관련된 부자재만 수십개라 일률적으로 단가를 산출하긴 어렵지만 최소 10%씩은 오른 것 같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나프타 가격 인상분과 그에 따른 협력사의 마진 등까지 모두 고려해 협의를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 주요 식품사들은 당장은 비축분으로 버텨보겠다는 입장이다. 농심 관계자는 "라면 포장지는 계열사인 율촌화학에서 공급받고 있는데 (율촌화학을 통해 확보한) 비축분은 약 2~3개월 분량"이라며 "비축분이 가격 변동의 완충장치는 되겠지만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음료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롯데칠성 측은 "음료용 패키징에 쓰이는 PET(페트)와 PE(폴리에틸렌) 폴리머 제품 등은 국내 석유화학 회사를 통해 약 3개월간의 물량을 확보한 상태"라며 "현재까지는 공급에 큰 차질이 없으나 사태 추이를 매우 긴박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현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주요 석유화학업계, 중소 포장재 업체, 협력사에서 식품업계까지 이어지는 '연쇄 셧다운'까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섞인 전망이 나온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하나의 원자재만 없어도 완제품 전체를 완성할 수 없는 게 식품 산업의 특성"이라며 "개별 기업 차원에서 수입선을 다변화하거나 대응방안을 마련하기엔 한계를 넘어섰다. 사실상 제품 생산이 불가능한 '자연재해' 수준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 차원의 수입 경로 확보 지원 등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4일 오후 김용재 차장 주재로 한국식품산업협회에서 식품업계 간담회를 개최한다. 식품업계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면서 중동사태로 인한 식품 원자재 수급 상황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