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가 배경인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30여년 전 당시의 옷차림, 언어, 사회상황, 생활양식 등을 세심하게 고증하고 재현해 많은 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얼마 전 90년대를 소재로 한 ‘응답하라 1994’ 시리즈도 화제가 된 바 있는데 왜 머지않은 과거를 다루는 드라마가 주목을 받는지 궁금해진다. 다양한 이유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2016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갖는 어떤 ‘결핍’이 반영된 결과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오래전에 살던 동네를 지나간 적이 있다. 서울 강남지역 개발이 막 시작되던 시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아파트단지인데 필자에겐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설렘으로 마주한 그곳은 어느 대형 건설사의 거대한 공사판이 돼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주변을 다시 돌아봤지만 길도, 건물도, 건물 사이의 공간도, 놀이터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유년시절 기억의 뿌리를 도둑맞은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물론 낡은 건물은 언젠가 다시 새롭게 지어지게 마련이지만 기억의 흔적이 되는 작은 골목조차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런 일은 사실 드물지 않다. 좋은 학군을 찾거나 집값이 더 저렴한 지역을 찾아서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 보면 기억의 끈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낡은 주택이 밀집했던 동네는 유명 건설사가 시공한 매끈한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하고 기존 주민이 떠난 곳은 낯선 외지인들이 들어와 채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반복해온 결과가 오늘날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도시의 민낯이 아니던가. 어린 시절의 향수가 차올라도 되돌아갈 장소가 없는 수많은 사람의 상실감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미디어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웃들이 모여 수다도 떨고 음식도 나눠 먹던 정겨운 골목길을 생생히 재현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결핍과 아쉬움을 달랜다.
세상 모든 일은 특정 ‘장소’를 전제로 한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음악을 듣거나 공부를 할 때도, 거리를 걷거나 여행을 할 때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특정의 공간 혹은 장소와 결부된다. 공간이 없는 삶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공간을 잃어버린 기억은 온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발과 이윤추구를 구실로 스스로의 기억의 뿌리를 헤집고 파괴해왔다. 소수의 대형 건설사에 커다란 필지를 개발할 권리를 부여해 그 안에 존재하던 수많은 공간적 요소를 한 번에 지워버리는 일이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대도시의 오래된 동네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곳에 오래된 한옥들이 남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건물이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도 길과 거리가 변함없이 남아 사람들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억과 연관된 중요한 공간적 요소는 건물과 건물 사이, 즉 골목과 길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비어 있는 공간인 광장을 유지해 도시의 가치를 높여왔다. 이제 우리도 세련된 건축물 짓기에만 관심을 갖기보다 비어 있는 공간의 가치에 주목해야만 한다. 더 이상 소수의 대형 건설사가 공간과 기억을 마구잡이로 유린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길과 골목을 보존하기 위해 필지를 작게 쪼개 다양한 건축업자와 건설사들이 개성 있는 건물들을 짓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금도 뜻있는 건축가,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이 골목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들에게만 맡겨두기엔 사라지는 우리 기억의 뿌리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