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종로구 재동(齋洞) 초입에 있는 헌법재판소. 재동의 이름에는 조선시대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등을 참살한 계유정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이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진동해 마을 사람들이 집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어야 했는데, 이게 재동의 유래다.
# 헌법재판소 마당에는 제중원(濟衆院) 설립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시발점이 된 우정국 사건 당시 민영익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를 서양의술로 살린 사람이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이다. 고종은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영식의 집(헌법재판소 자리)에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 명칭은 설립 당시 광혜원이었는데 2주만에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이어서 그런지 재동과 제중원의 이 같은 역사를 보면 자연스럽게 헌법재판소를 떠올리게 된다. 헌재가 혹 국민들에게 재를 뿌리지 않을지, 옛 제중원처럼 국민들을 치유해줄지에 관심이 간다.
재판관 출신인 모 변호사는 헌재를 “법과 정치 사이에 놓여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정치적으로 선고해선 안 되며 그렇다고 법대로 모든 걸 결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헌재 재판관 9명에게 탄핵의 결정을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문제 제기는 헌재 설립 초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헌재 설립을 앞장서 추진한 한 정치인은 "우리가 만들려고 한 헌재는 이게 아닌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접수된 후 헌재 재판관 9명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듯하다. 재판관 면면과 성향을 분석하는 보도가 잇따르는 데다 헌재 앞에서 촛불집회 참석자들은 "빠른 탄핵 결정"을 외치는 반면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는 "탄핵 반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 재판관 중 요즘 제일 관심을 받는 이는 이정미 재판관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임기 만료 직전에 헌재의 결정이 나올 것이란 전망이 확산돼서다. 머니투데이 더엘이 전직 헌재 재판관과 헌법학자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다수가 "내년 3월13일 이정미 재판관 퇴임 전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달 초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을 만나 '행상책임'을 언급할 때만 해도 헌재 결정이 박한철 소장 퇴임일인 내년 1월 말까지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태도, 즉 ‘행상책임’을 다루므로 형사책임을 입증하는 것보다 빨리 끝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헌재가 선별심리를 하지 않고 13가지나 되는 탄핵사유를 모두 들여다보겠다고 밝힌 데다 박 대통령이 답변서에서 "탄핵소추안에 기재된 헌법·법률 위배 행위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함에 따라 내년 1월 말 결정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헌재가 차선책으로 이 재판관 퇴임 직전을 선택할 것이란 게 다수 전문가의 예상이다. 이들은 헌재가 준비절차를 도입하면서 이정미 재판관을 수명재판관으로 지정한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이 재판관을 준비절차부터 참여시켜 그의 퇴임 전에 마무리하겠다는 헌재의 의지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엔 심판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이내 선고해야 한다고 돼 있다.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지 이제 12일이 지났고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일은 82일 남았다. 헌법에 규정된 180일의 절반쯤 되는 날에 헌재가 선고하면 그렇게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헌재의 통상 선고일은 목요일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기각(2004년 5월14일)과 통합진보당 해산(2014년 12월19일)은 금요일에 결정했다. 이를 유추하면 박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는 3월 둘째주 목·금요일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재동에 이른 봄꽃이 필 때는 헌재가 국민들을 치유하는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그보다 더 빠르면 치유 효과가 더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