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탐독했다던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의 ‘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의 한 문장이다. 이건 터너만의 통찰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요 국가의 민간부채가 국가부채로 옮겨갈 때 널리 퍼진 얘기다.
빚이 없어지지 않고 이전된다는 점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게 있다면 건설사와 은행이 부실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기업부채가 가계부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부채와 부실 위험이 없어지지 않고 오직 한 곳, 가계에 집중됐다는 의미다.
최경환 경제팀이 빚을 내 집을 사라고 권한 2014년 8월 무렵 건설사의 재무제표는 해외사업 부진과 미착공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으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단적인 예가 GS건설이다. 2013년 2월 어닝쇼크 발표 전 1조2000억원의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발행했다. 천문학적 손실을 숨기고 시장에서 돈을 조달했다는 혐의로 분식회계 논란이 있었고 이는 집단소송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GS건설은 주택사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1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거뒀다. GS건설뿐만 아니라 주요 건설사들의 실적과 재무제표에 관한 스토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건설사에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도 좋아졌다. 핵심상품인 주택담보대출에다 전세자금대출, 신용대출 등이 잘 팔리면서 지난해 대다수 은행이 사상 최대 순익을 냈다.
그러는 사이 가계부채(한국은행 가계신용 기준)는 늘고 또 늘어 지난해 말 1534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2014년 6.5%에 그친 가계부채 증가율은 2015년 10.9%, 2016년 11.6%, 2017년 8.1%를 나타냈다. 지난해 5.8%로 다소 둔화했다. 같은 기간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비율과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점증했다. GDP와 소득보다 빚 느는 속도가 더 빨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금리를 낮추면 생산적인 쪽으로 돈이 흘러가지 않고 부동산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LTV(주택담보인정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 등을 완화하며 의도적으로 집값을 부양한 정책 때문이다. 이미 2003년부터 10년간 평균 GDP 성장률(명목)은 5.9%인 데 비해 가계부채 증가율은 7.6%로 높았다. 그럼에도 빚을 내 집을 사라고 했다. 미국이 양적완화 정책을 폈지만 은행은 DTI를 43%로 유지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정부가 LTV와 DTI를 낮췄고 2017년 6월 말까지 일몰을 연장하며 노골적으로 부동산경기를 띄웠다. 현정부도 집권 첫해 조정대상지역만 LTV와 DTI를 10%포인트씩 낮췄다가 집값이 계속 폭등하자 신DIT와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를 도입했다.
은행 등 금융회사 대출을 통해 인위적으로 떠받쳐놓은 부동산 가격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활황기의 끄트머리로 갈수록 가격을 떠받치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나중에 집을 사는 사람들의 자금력은 먼저 산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유동성의 무한한 공급도 불가능하다.
지난해 9·13 조치는 뒤늦었지만 정부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애초 유동성으로 올린 집값이니 유동성을 줄이면 되는 일이었다. 재건축조합원 지위 양도를 못 하게 하고 임대사업자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매물을 잠기게 한 실책 따윈 할 이유가 없었다. 머니게임이 벌어지는데 극단적인 수급불균형을 정부가 야기했으니 그대로 두면 가장 늦게 진입하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하우스푸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부동산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의 비판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이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며 가계부채에 기댄 유동성 파티를 수습하는 것이다. 분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