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STX다롄조선소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여의도 면적 1.7배의 550만㎡ 부지에 거대한 도크, 골리앗 크레인이 위용을 자랑했지만 보하이만의 매서운 바람 외에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3만 명에 달했다는 직원은 온데간데없고 작업을 마치지 못한 선박만 폐선처럼 방치돼 있었다.
다롄조선소는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10대 그룹까지 넘봤던 STX그룹을 공중분해 시켰다. 28억 달러(3조원)라는 그룹 역량을 넘어서는 무모한 투자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부메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샐러리맨 신화’를 창조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에게 다롄은 사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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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STX그룹 얘기를 꺼낸 것은 10년의 시차를 두고 데자뷔처럼 반복된 한진중공업그룹 때문이다. 최근 채권단은 한진중공업홀딩스와 조남호 회장이 보유한 한진중공업 보통주를 전량 감자했고, 지배력을 잃은 조 회장은 회사를 떠나게 됐다.
그가 고(故) 조중훈 창업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을 잃은 것은 필리핀 수빅조선소 부실이 원인이 됐다. 2조원을 쏟아붓고서도 최근 3년간 5000억원에 달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모회사인 한진중공업까지 쓰러지고 말았다. 필리핀의 값싼 노동력을 노리고 진출한 수빅조선소가 치명적인 늪이 됐다. 중국 다롄 부실에 발목이 잡힌 강 전 회장과 닮은꼴이다.
다롄과 수빅 투자는 두 그룹 오너의 독단적 결정으로 이뤄졌다. 강 전 회장은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급팽창하는 사세에 취해 중국행을 밀어붙였다. 조 회장 역시 건축·토목 등 조선 전문가가 아닌 인물을 최고경영자로 임명하는 등 경영실패에 책임이 크다.
"최악의 리더는 조직의 미래를 망치는 리더"(권오현 삼성전자 회장)라는 지적처럼 두 회장은 대표적 오너리스크 사례로 평가된다. 오너의 잘못된 판단이 수천, 수만명 임직원의 일자리를 잃게 하는 결과를 낳은 만큼 반면교사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한진가 수난사'라는 측면에서 조 회장에 대한 동정론이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이번에 오너리스크가 시장에서 투명한 절차를 거쳐 심판받았다는 점에서 수긍하는 분위기다. 채권단이 정치권 압력이나 지역 정서 등 외부 영향력에 좌우되지 않고 '경영실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만으로 감자 등 경영정상화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재계 불신은 오너리스크를 순수하게 경제논리로 판단하기보다 '대기업 길들이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과 관련 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이사 선임을 반대하고 3월 주총에서 표 대결을 예고했다. 배당에 인색한 남양유업에는 배당정책을 논의할 위원회를 설치하자며 정관 변경 주주제안을 했다.
한진과 남양유업은 오너 일가 갑질로 물의를 일으킨 기업이다. 그런 만큼 국민연금의 개입에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국민연금도 갑질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경제'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 대기업 대주주에 대한 적극적인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를 독려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상은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은 한진과 남양유업이라는 국민 밉상이 대상이지만 국민연금, 또는 정부 판단에 따라 갑질 기업이 누가 될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맡긴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정책 목적 달성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업가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오너리스크는 국민연금이 아니라 시장에 맡기는 게 순리다. 기업 길들이기 오해를 피하려면 국민연금은 연금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