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최근 '변화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를 열었다. 코로나 충격으로 3년 만에 재개했는데 세계적 통화정책 전문가들이 모여 관련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번 주제는 아무래도 최근 부상한 인플레이션 위험을 의식한 모양이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방불케 하는 인플레이션 충격으로 통화정책이 본연의 역할, 즉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위상을 되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문제의식이 커진 것이다.
1970년대는 오일쇼크도 문제였지만 그 이상으로 닉슨의 금태환 중지에서 시작된 금환본위제 폐지, 또 전후 자본주의 세계를 지탱한 브레튼우즈체제 붕괴가 쟁점이었다. 이런 가운데 세계적으로 기업 수익성 및 생산성 하락과 맞물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경고가 확산했고 OPEC 금수조치와 맞물린 인플레이션 충격은 그 연장선이었다. 결국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필두로 주요국이 고강도 디스인플레이션(인플레이션 안정화) 처방, 곧 대규모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실업률이 치솟고 경기가 급락하는 등 충격이 컸지만 대부분 단명에 그치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 회생의 주춧돌로 작용했다.
본래 경제학은 시대에 기생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 중앙은행 위주 디스인플레이션 정책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외견상의 물가안정에 가리어 금융안정 훼손이라는 대가를 수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결과였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의 역할에 금융안정(거시건전성 관리) 책무가 추가됐다. 이후 회복과정의 불균등성에 따른 양극화 문제와 노령화 등 만성적 수요부진에 기반한 장기정체 위험이 새로운 이슈로 가세했고 코로나 위기는 여기에 디지털 전환 및 기후변화의 도전에 따른 책임도 얹었다.
이러한 역할확대는 중앙은행의 권한을 벗어난 일인지 모른다. 순환적 차원 이상의 구조적 문제들은 물론이고 기술혁신이나 기후변화, 심지어 지정학적 위험까지 통화정책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크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정책목표나 수단을 확대 보완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고 실제로 금융안정 책무의 명시화는 물론 양적완화와 마이너스금리 도입, 나아가 물가목표 상향이나 명목GDP목표제 등 다양한 대안이 모색됐다. 그러나 이제 인플레이션 위험이 재부상하면서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초저금리의 유혹을 끊고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사회적, 경제적 책임들은 여전히 남는다. 통화정책의 한계도 고려해야겠지만 단순한 과거로 회귀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울러 당장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나면 저성장과 저물가의 장기정체 문제가 다시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한편 가상자산(암호화폐)의 부침은 법화체제에 기반한 중앙은행의 신뢰성을 근저에서 흔들 수도 있다. 한국은행 신임 총재는 개회사에서 "300년 넘게 중앙은행이 걸어온 역사는 바로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역설했다. 통화정책 정상화의 미망에 끌려다니기보다 역동적인 변화의 조건하에서 경제안정과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