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제약기업과 연구소가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경쟁한다. 신약개발에는 평균 10년, 수천억 원의 개발비가 들고 실패확률이 90%에 달한다. 생명을 다루는 이 산업은 그 자체로 거대한 도전인데 AI(인공지능)의 등장은 이 산업의 규칙을 뿌리째 바꿔놓았다. AI는 단순한 분석도구를 넘어 과학자와 함께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공동과학자'(AI Co-Scientist)로 진화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예측'이다. AI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정밀하게 예측하고 수많은 조합의 화합물 중 유망한 신약 후보물질을 선별한다. 전임상 단계의 효능과 독성을 사전에 평가하고 디지털트윈 기술을 이용해 임상시험 시나리오도 가상으로 구현할 수 있다. 그 결과 신약개발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줄어들고 성공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이 흐름을 선도한다. 빅테크들은 AI, 클라우드컴퓨팅, 데이터 분석기술 등을 활용해 신약개발에 직접 참여하고 글로벌 제약기업들은 빅테크를 활용한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으로 생성형 AI 신약개발 플랫폼 사업을 확장한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 플랫폼 '바이오네모'(BioNeMo)를 신약개발 파운드리로 확장하고 제약기업과 공동으로 신약개발에 특화된 슈퍼컴퓨터를 개발 중이다.
현재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는 다수의 파이프라인(후보물질) 보유에 따른 개발비용 증가, 임상시험 성공률 하락 등으로 연구·개발 생산성 개선의 필요성을 크게 인식한다. 이를 돌파할 해답으로 AI를 활용한 신약개발이 주목받는다. 올해 초 LG AI연구원은 '단백질 다중상태 구조예측 AI 개발'을 통해 인체 내 다양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신약개발 원천기술을 확보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국내에서도 AI 신약개발 기술의 고도화 경쟁이 본격화했음을 보여준다.
최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AI를 활용한 혁신 신약개발의 동향 및 정책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빅테크들은 신약개발보다 의료데이터 분석이나 건강관리 서비스 개발을 우선 추진한다. 제약·바이오기업들도 AI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등 간접적인 접근방식을 선호한다. 빅테크와 제약·바이오기업들은 협업보다 자체 AI 신약개발 플랫폼을 구축해 독자적인 신약개발 파이프라인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더 뚜렷하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국내 AI 신약개발 시장은 아직 개별 기업 중심의 초기적 접근에 머물러 있으며 임상시험 단계로의 진입은 제한적인 상황이다. AI는 고품질 학습데이터가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지만 국내 바이오데이터는 병원, 연구기관, 기업에 파편화돼 있고 표준화도 미비하다. 이로 인해 AI의 학습과 해석이 어렵고 개인정보 보호와 알고리즘의 신뢰성문제 역시 기술 상용화에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정부는 산업계와 협업해 데이터 표준화, 공유 인프라 구축, 전문인력 양성, 규제 프레임워크 정비 등 기반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자체 AI 신약개발 플랫폼을 기반으로 소규모·분절화한 형태로 개발을 추진하는 현주소를 진단하고 글로벌 빅테크 및 제약기업들과 전략적 파트너십 확대를 통해 파급력 있는 성과를 유도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제 질문은 "AI를 신약개발에 활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AI와 어떻게 함께 연구할 것인가"로 바뀌었다. 누가 먼저 AI를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함께 사고하며 연구할 수 있는지가 신약개발의 성패를 가른다. 신약개발의 패러다임은 '시간과 비용의 싸움'에서 알고리즘 설계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느냐에 따라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앞으로 10년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