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죽주산성 샘과 '지피지기 백전불태' 진리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2025.08.28 02:05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오늘은 적이 반드시 어떤 기계를 설치할 것이므로 우리는 어떤 기구를 준비해 그에 대응해야 한다."

'고려사' 열전의 송문주전에 나오는 송문주 장군의 말이다. 몽골군의 3차 침입 때인 1236년 8월과 9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으로서 죽주성에서 15일간 격전을 치렀다.

몽골군이 이르자 과연 그의 말과 같았고 성안의 사람 모두 그를 신이 준 지혜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몽골군의 공격전술을 모두 알고 있었고 이는 '적과 나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지피지기(知彼知己)에서 지피에 해당한다. 그의 이런 경험과 지식은 평안도의 구주성 전투에 직접 참여하며 익힌 것이다. 몽골군은 화포를 쏘기도 하고 죽은 사람으로부터 짜낸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는 등 다양한 공격을 해왔지만 모두 실패하자 15일 만에 공성무기를 불태우고 물러갔으니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백전불태(百戰不殆)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 죽주성은 현재 죽주산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성이라고 하면 해발 400~500m의 험준한 산 위에 축조한 둘레 7000m 이상의 남한산성처럼 대규모 외적이 침략했을 때 수천, 수만의 군사와 백성까지 함께 들어가 장기 항전을 펼친 초대형 산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경기 안성시 죽산면의 면소재지 북쪽에 있는 죽주산성은 해발 250m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성벽을 축조한 둘레 1322m의 중형 산성에 불과하다.

죽주산성처럼 통치자가 거주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고대의 통치성은 유럽에서 흔한 산 위의 궁성이나 영주성처럼 일상적으로 오르내리기에 어렵지 않도록 높지 않은 곳에 만들었고 고을의 주요 지역 대부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또한 고을의 적은 병력만 들어가 방어하는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갖도록 산 정상을 중심으로 경사가 심한 지형을 둘러싸며 성벽을 만든 테뫼식 산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들 고대의 통치성은 강한 적의 장기 포위전엔 매우 취약했다.

장기 포위전에 맞서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오랫동안 마실 수 있는 신선하고 풍부한 물이다. 그런데 방어가 어려운 골짜기를 포함하지 않게 축조한 테뫼식 산성은 자연스럽게 흐르거나 솟아나는 물이 없어 장기 포위전을 견뎌낼 수 없다. 그래서 강한 적이 장기 포위전략을 취하면 항복하거나 성문을 열고 나가 정면으로 맞서다 패하는 수밖에 없고 몽골의 침략 때 모든 고을에 하나씩 있던 통치성은 대부분 쓸모가 없어서 방어거점으로 삼지 않았다. 다만 죽주산성 등 몇 개의 통치성만 예외였다.

죽주산성은 해발 250m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사방의 급한 경사를 둘러싼 테뫼식과 북쪽에 신기하게 형성된 작은 골짜기를 포함한 포곡식의 혼합산성이다. 동문에 들어서면 넓지는 않지만 완만한 경사의 개활지가 나타난다. 이곳에 삼국시대부터 만든 여러 개의 연못 유적이 겹쳐서 발굴됐다. 이 연못의 물은 그냥 고여 있는 게 아니라 서쪽 위의 샘에서 흘러나와 공급되는 신선한 물이었다. 송문주 장군은 높은 방어력의 지형과 성곽뿐만 아니라 이 샘이 있었기에 몽골군의 침략에 대한 방어거점으로 죽주산성을 택했고 몽골군이 장기 포위전을 구사할 수 없었던 근본 이유다. 이것이 지피지기에서 지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 샘은 죽주산성 전투의 영웅 송문주 장군의 사당 바로 앞쪽에 있다. 죽주산성을 여행했음에도 이 샘을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죽주산성 전투의 승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죽주산성의 진가를 절반만 본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무한경쟁이 일상인 요즘 앞서나가진 못해도 뒤처지지 않고 싶을 때 죽주산성을 찾아 780여년 전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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