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이 문 닫았으면 편의점으로 가세요."
매년 명절을 앞두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신문·방송 기사 제목들 중 하나다. 올해는 유독 길었던 추석 연휴 탓에 이런 안내성 헤드라인들에 눈길이 더 간게 사실이다. 특히 휴일이나 야간에 갑자기 아이들이 열이 나거나 배가 아파 당황하거나 고생한 적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동네 약국이나 병원이 열지 않아 급하게 찾아간 응급실에서 별다른 조치도 없어 대기하면서 애를 태웠던 경험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집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악몽 중 하나다.
그러다보니 매년 편의점에서 파는 안전상비의약품(이하 안전상비약) 품목을 늘려달란 국민들의 요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22일 사단법인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가 발표한 '편의점 안전상비약 제도 개선을 위한 소비자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5.8%가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 필요성에 동의했다. 이는 2년전 조사의 응답률(62.1%)과 비교해 무려 23%포인트(p)나 높아진 결과다.
이들 응답자의 83.8%가 편의점 안전상비약을 구매한 경험을 있다고 답했는데 직전 조사 응답률(71.5%)보다 11.7%포인트 상승했다. 구매 사유로는 '공휴일 및 심야에 급하게 약이 필요해서'(68.8%)가 압도적 1위로 꼽혔고, '가까워서'(39.6%)와 '다른 목적으로 갔다가 구매 필요성을 느껴서'(17.5%) 등도 그 뒤를 이었다.
실제로 편의점 GS25가 올해 추석 연휴 당일 포함 사흘(10월5~7일)간의 안전상비약 매출은 전달 같은 기간(요일) 대비 100% 가까이 신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도 "명절이나 휴일, 주말(토·일요일), 심야 시간대 등은 물론 의료 취약지에서 의료 공백이 발생할 때마다 안전상비약 매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며 "안전상비약의 경우 매년 명절이 되면 점별 보유 물량을 3~5배 확충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에 정부도 매년 수십억의 혈세를 투입해 공공 심야 약국을 운영하고 있지만, 전체 규모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한밤 중까지 영업하는 사례가 드물어 실효성이 떨어진단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안전상비약은 해열·진통제, 소화제, 감기약, 파스 등 4개 효능군 11종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일본·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선 최소 120종에서 많게는 약 30만종까지 일반의약품을 소매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행법에서 허용되는 안전상비약은 최대 20개 품목이다. 정부가 2012년에 우선 13개 품목을 지정한 후 6개월 후에 재검토키로 했지만 품목 재조정 논의는 13년째 제자리다. 그마저도 어린이용 타이레놀정(80㎎)과 타이레놀정(160㎎)은 국내에서 생산이 중단되면서 취급 품목이 11개로 줄었다. 지사제를 비롯해 제산제와 화상연고 등 부작용이 적고 사용빈도가 높은 약에 대한 긴급 수요는 늘고 있지만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는 제도 도입 후 한번도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실제로 시민네트워크 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제한과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새 효능군 추가'와 '증상별 세분화'를 최우선 제도 개선 과제로 꼽았다. 편의점업계에선 긴급성을 요하는 화상 연고나 위장 진정제, 지사제, 인공 눈물 등에 대한 판매 허용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대한약사회 등 약사 단체는 약물 오남용 우려를 내세우며 반대하고 있다. 해당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이같은 사정을 뻔히 알고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안전상비약 품목 조정을 담당하는 지정심의위원회는 2018년 이후 구성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오직 국민만 믿고, 국민만 바라보며, 국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이재명 대통령의 약속처럼 이제라도 새 정부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다. 이미 편의점이 안전상비약의 긴급 구매처로 자리를 잡은 만큼 국민들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취급 품목 확대 논의에 속도를 내야 한다. 내년 설 명절엔 응급약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일이 없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