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상 칼럼] 왜 글로벌 사우스가 급부상했을까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
2026.02.03 06:00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2026년 2월 현재, 트럼프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를 포함한 다자 무역 체제에서 사실상 이탈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간 세계 경제를 지탱해 온 다자주의 무역 질서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8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 그리어 대표는 WTO 체제가 미국의 이익에 반하고,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사실상 종식을 선언했다. 동시에 WTO 기반의 다자간 자유무역 대신,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반영한 새로운 무역 질서인 '트럼프 라운드(Trump Round)'를 제시했다. 개별 국가와 양자 협상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다. 트럼프는 이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지난달에는 66개 국제기구(유엔 산하 31개, 비유엔 35개)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1월 말에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 유럽연합(EU)과 인도는 20년간 이어진 협상 끝에 FTA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양측 모두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격적으로 관계 강화에 나선 결과다. 이로써 전 세계 GDP의 25%를 차지하며 인구 20억 명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우리가 해냈다. EU·인도 FTA는 모든 협정의 어머니(Mother of All Trade Agreements)라 할 수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체결된 어느 무역 협정보다 규모, 범위, 중요도 면에서 가장 크고 포괄적이라는 의미다. 모디 인도 총리도 "역사적인" 협정이라고 극찬했다.

지난달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제56차 세계경제포럼(WEF)은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긴장과 기술적 변혁 속에서 협력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대화의 정신(A Spirit of Dialogue)'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진정한 대화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한 실질적 협력의 길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절된 세계 속에서의 협력 강화',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 '사람에 대한 투자', '책임감 있는 기술 혁신', 그리고 '지구 환경을 고려한 번영'이라는 5가지 핵심 의제에 대해 논의하며 인류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함께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껴진 분위기는 '대화'보다는 치열한 '생존 전략의 각축장'에 가까웠다. 공통의 해답을 찾기보다는 단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데 그쳤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유럽은 '규제 선점'에 주력하며, 중국은 '기술 자립'을 외치며 전 세계가 점점 더 다극화 체제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WEF에서 가장 주목받은 세력은 단연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였다. 글로벌 사우스는 전통적 선진국인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인도, 아세안(ASEAN),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북반구 저위도와 남반구에 있는 신흥개발도상국을 통칭한다. 글로벌 사우스는 전 세계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며, 에너지 전환에 필수적인 리튬, 코발트, 희토류 등 핵심 광물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파른 경제 성장률을 바탕으로 전 세계 기업들이 놓칠 수 없는 핵심 소비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될수록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결속하거나 제3의 선택지(EU-인도 FTA 등)를 찾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이제 이들은 과거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글로벌 경제와 안보의 향방을 결정하는 캐스팅보트 자리를 차지하며 '실력자'로 위상이 바뀌었다.

글로벌 사우스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는 전 세계의 34%를 차지하며, 미국, 유럽, 중국에 이어 '세계 4번째 블록(Block)'이라 불린다. 일본·한국·이스라엘·호주 등 친미 국가의 비중은 10% 수준이다. IMF에 따르면 2023~29년 글로벌 사우스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3%로 글로벌 노스의 3.9%를 압도한다. 전 세계 생산가능인구(15~60세)의 63%를 차지하며, 자원도 풍부하다. 또한 전 세계 에너지 및 전기차 배터리 생산 등에 필요한 광물의 41%, 세계 무역의 25%, 국방비 지출의 18%를 차지한다. 이처럼 세계 경제에서의 비중이 커지고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국제 질서 지형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전망이다. 트럼프 라운드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가 부각되는 이유다.

트럼프 라운드에 따른 세계 경제의 새판짜기는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비록 강압적으로 한국과 일본, 영국·호주 등의 합의를 받아냈지만, 미국이 넘어야 할 장벽은 만만치 않다. 새로운 체제에 맞서는 '대(對) 트럼프 세력'이 본격적으로 결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중국, 인도, 브라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독선으로 국경 분쟁으로 냉랭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중국과 인도도 가까워지는 분위기다. 이들의 공동 전선에는 러시아도 포함된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미국 등 서방의 각종 제재가 계속되고 있지만 중국과 인도는 원유 구매 등 러시아와의 교역을 이어가고 있다.

브릭스(BRICs)가 트럼프에 맞서는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이들은 적극적으로 글로벌 사우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2026년 다보스 리스크 보고서가 향후 2년 내 가장 큰 위협으로 '지경학적 대립(Geoeconomic Confrontation)'을 꼽은 상황에서, 글로벌 사우스와의 연대는 전 세계 모든 기업의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됐다.

이미 이러한 흐름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애플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이라는 전략으로 인도 생산을 늘려왔다. 중국 의존도를 낮춰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다. 중국의 제3국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생산 공급망을 아세안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브라질 등으로 넓혀가고 있다. 원자재 시장 수급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수입선 다변화를 위해 중국이 식량 수입을 남미 국가로 확대하면서 지난해 중국의 최대 콩 수입국은 브라질이 됐다. 브라질의 대중 무역 비중은 24%로 미국(16%)을 앞질렀다.

급변하는 국제질서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주요 국가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인도는 과거의 비동맹주의가 아니라, 이익 중심의 다동맹 전략을 선택했다. 베트남은 특유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나무 외교로 이익을 추구한다. 튀르키예 역시 실용적인 균형 외교를 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의 결속은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체제에도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 페트로 달러 체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수출 대금을 달러로만 결제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함으로써 유지돼 온 달러 중심의 국제 경제 및 금융 질서다. 페트로 달러 체제에서 원자재 거래 결제 통화로 달러가 사용되면서 중동 국가들은 원자재 판매로 번 돈을 달러 자산에 투자하며 외환보유액을 쌓았고, 달러 패권은 공고히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입김으로 '페트로 위안(Petro Yuan)'이 페트로 달러를 잠식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몸집이 커지며 미국 달러를 지급 및 가치 저장 수단으로 사용하는 달러 패권 중심의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 현상이 약화되고 '탈달러화(De-dollarization)'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은 한국 경제 부활을 위한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경제·정치적으로는 글로벌 노스의 핵심 국가이지만,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사우스와 가장 잘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과거 식민 지배와 전쟁의 폐허에서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로서의 한국의 산업화 노하우와 디지털 전환(DX) 기술을 공유하며 'K-GSP(Korea-Global South Partnership)'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전 세계를 매료시킨 K-신드롬을 최대한 활용할 수도 있다.

새로운 경제 질서 하에서 다시 한번 힘차게 비상하는 한국 경제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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