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거점국립대 육성 예산은 8855억원이다. 전년 예산 4242억원의 2배를 훌쩍 넘는 규모로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쓸 돈이다. 지방 중소규모 사립대 약 20곳이 1년 내내 쓰는 예산을 거점국립대 9곳에 추가로 얹어주는 셈이다. 기대효과는 거점국립대 학부교육 혁신, 지역 연계형 연구대학으로 도약, 대학 서열화 완화, 5극3특 국가균형성장이다. 정책이 성공해서 과거 국립대의 경쟁력과 위상을 되찾고 전체 고등교육 경쟁력 향상에도 이바지하길 바란다. 그런데 정책의 취지가 좋고 많은 예산을 들인다고 그것이 곧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큰돈을 쓰면서 프로그램은 화려해지고 보고서도 두꺼워졌는데 현장에서는 "그래서 뭐가 달라졌지"라고 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책이 성공하려면 2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정교한 정책설계와 엄정한 평가다. 설계가 흐리면 방향을 잃고 평가가 느슨하면 변화는 멈춘다.
먼저 정부와 대학은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목적은 '왜, 하는가'다. 지역 거점대의 경쟁력과 공공성 강화, 국가 연구·인재양성 기반 다핵화 같은 큰 방향이 여기에 해당한다. 목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달성할 것인가'다. 측정과 평가가 가능하고 성과를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은 목적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정책이 흔들리지 않게 기준과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반면 정책의 목적을 구현할 하위목표와 과제는 대학이 세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대로 한다. 정부가 목적부터 세부과제까지 '백화점식'으로 늘어놓고 대학은 각 항목을 체크하고 해석하느라 바쁘다. '예시'라고 해도 오랫동안 정부사업에 길들여진 대학은 '전부 다 하라는 뜻'으로 읽는다. 모든 걸 하라는 것은 모든 걸 적당히 하라는 말이다. 투자가 분산되고 책무성은 희미해진다. 무엇보다 대학의 특성화 기회를 앗아간다.
지역과 대학의 여건이 다른데도 같은 처방을 하면 대학은 방향과 전략을 잃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정부 부속기관'으로 전락한다. 대학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자기 주도성과 자활의 의지가 필요하고 핵심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과제를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다음은 경쟁이다. 경쟁은 대학을 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목표를 만들 역량과 혁신의 의지가 있는 대학을 가려내는 장치다. 지금처럼 거점국립대라는 '지원대상'을 미리 정해놓고 경쟁이 없으면 '나눠먹기 게임'에 빠진다. 경쟁의 압력이 없으면 관심은 '무엇을 바꿀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를 받을 것인가'로 바뀐다.
경쟁이 대학 간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학 내부에서도 최고의 수준으로 도약할 잠재력이 있고 혁신의 의지가 강한 분야를 정해 과감히 밀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균등배분의 미덕에 사로잡혀 제자리에 머무는 대학으로 남는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서울대 따라하기'가 아니다. 추격형 전략으로는 몇 배 더 많은 자원과 인력을 가진 서울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승산은 '다른 길을 가는 전략'에 있다. 거점국립대가 각자 강점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는 서울대가 긴장하는 수준이 되도록 뛰어야 한다. 그럴 때 서울대도 안주하지 못하고 우리 고등교육 생태계는 활력 넘치는 건전한 경쟁의 장이 된다.
거점국립대에 '기회의 창'이 열렸다. 학생의 성공을 중심에 둔 교육과정 대전환, 세계를 향해 찾아나서는 인재영입, 성과 기반 평가와 보상까지 대학 스스로 혁신하고 체질을 바꾸면 정부가 손을 떼도 흔들리지 않는 명문대가 될 것이다. 반대로 보여주기식 단기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사진과 보도자료로 성과를 내세우는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혁신은 '행사'로 둔갑하고 대학은 또 다음 사업을 기다리는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혁신할 역량이 없는 대학은 세금을 쓸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