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났다. 동면(冬眠)하는 동물들처럼 식물도 봄 꽃을 피우며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린다. 이런 자연의 섭리 속에서 유독 인간만이 쉽게 잠들지도 또 완전히 깨어나지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4/7: 잠의 종말'이라는 책은 오늘날 최대의 생산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하루 24시간 주 7일, 단 한 순간도 비워두지 않는 시간 활용을 요구하면서 위협받는 개인의 밤과 잠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모든 시간을 노동과 소비, 데이터 추출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이 시스템은 수면을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인 시간으로 폄하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식민화하려 한다. 결국 우리가 겪는 수면 강박은, 단 한 순간도 네트워크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후기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절대 각성' 요구에 대한 처절한 반작용인 셈이다.
숙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넘쳐나고, 수면 주기를 측정하는 스마트워치, 백색소음 앱, 특별히 고안된 가구와 침구, 수면 보조제까지 동원하는 이른바 '슬립테크(Sleep-tech)'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상품화한 수면 측정 프로그램이나 숙면 유도 기술은, 더 공부하고 일하고 더 '쌩쌩하게' 놀기 위해 마시는 카페인 음료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다음 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잠을 재우려는 것 역시 극대화된 성과를 위한 '관리와 통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숙면과 각성에 대해 보이는 모순된 강박은 도덕과 사회적 규범의 영역까지 침투한다. 예를 들면, 주체적으로 사태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사고해야 한다는 요구, 즉 사회에서 항상 '깨어 있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당위적 명령도 있다. 방관하지 않고 참여하는 이러한 태도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되지만, 사회 현실의 파악을 강조하다보니 비현실적 상상력을 억압하게 되기도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맥락을 깊이 살피고 숙고할 여유를 갖기보다 즉각적인 반응이 요구되면서,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다 끝내는 무기력감을 호소하는 개인도 등장한다.
나태한 백일몽의 상태와 각성 상태를 동시에 찬미했던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모순적 입장이 이해되는 것이다. 흔히 각성이라 하면 환상을 깨뜨리고 현실의 민낯을 직시하는 이성의 작용을 떠올리지만, 그에게 각성은 오히려 일종의 '중독적 환상'에 가까웠다. 반복되는 체계에 순응하는 일상적 감각과 달리,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각성 상태의 시선은 오히려 현실을 낯설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각성 상태로 꾼 꿈은, 출구 없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암울한 현실이 '당연한 것'이라는 허구를 벗겨내고 그 이면의 잠재성을 드러내는 통로였다. 암담한 현실 앞에서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이념을 외치는 대신, 하찮아 보이는 감각들을 되살려 도래할 세계를 치열하게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명징한 깨어 있음이었던 것이다.
개인을 끊임없이 통제하는 사회가 강제하는 위선적인 각성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쉼과 잠을 필요로 한다. 꼭 진짜 수면일 필요도 없다. 즉각적인 반응을 잠시 멈추고, 계속해서 꿈꿀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일부러 시간을 쪼개 극장이나 연주회장, 전시장에서 예술가의 상상과 마주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보리나 튤립 같은 식물들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일정 기간 마치 죽은 듯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동면은 차가운 어둠 속에서 개화를 준비하는, 가장 치열한 생화학적 변화를 일궈내는 역동적이고 필수적인 시간이다. 남들이 깨운다고 해서 필사적으로 눈을 뜰 필요는 없다. 진정한 깨어남은 충분한 어둠을 견뎌낸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아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