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미국 사모대출의 경고음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반영은 휴맥스해운항공 대표
2026.03.20 02:00

금융은 언제나 규제의 빈틈을 찾아 흐르며 진화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통적인 시중은행들은 강화된 자본 건전성 규제에 묶여 기업 대출의 문턱을 높였다. 그 공백을 파고든 것이 사모대출(Private Credit)이다. 은행보다 빠르고 공모채보다 유연한 이 자금창구는 중견·중소기업에게 가뭄의 단비였다. 투자자에게는 저금리 시대의 고수익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한때 '혁신'이라 불리던 사모대출은 어느 덧 글로벌 운용자산 규모 2조 달러를 훌쩍 넘어서는 핵심 자산군이 됐다.

하지만 최근 미국 대체투자 시장을 견인해 온 이 거대한 '그림자 금융 '시장에서 심상치 않은 파열음이 들려오고 있다. 세계 최대 대체투자 운용사인 블랙스톤은 이달 들어 대표 사모대출 펀드인 'BCRED'에 몰린 대규모 환매 요청(약 38억 달러 규모)에 대응하기 위해 분기 환매 한도를 상향하고 임직원 자금까지 투입해야 했다. JP모건은 AI 기술 발전에 따른 사업모델 훼손 우려가 커진 소프트웨어 기업 대상 사모대출 담보자산의 가치를 선제적으로 하향 조정(Markdown)하며 펀드들에 제공하던 백 레버리지(Back-leverage) 조이기에 나섰다.

이러한 경고음의 본질은 개별 기업의 부도 위험이라기보다, 시장 전체에 누적된 '구조적 취약성'에 있다. 사모대출자산은 본질적으로 만기 전까지 쉽게 현금화할 수 없는 비유동적 장기 자산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는 이런 비유동 자산을 기초로 하면서도 개인 투자자에게 분기별 환매를 약속하는 펀드가 급증했다. 평온한 시기에는 매력적인 구조지만, 시장이 흔들려 환매 요구가 몰리면 헐값에 자산을 던져야 하는 치명적인 유동성 미스매치가 발생한다. 여기에 이자를 현금 대신 채권이나 지분으로 얹어 받는 Payment-in-Kind(PIK:현물지급) 대출이 만연해지고, 차입자에게 유리한 느슨한 재무약정(Covenant-lite)이 일상화되면서 기업의 실질적인 부실은 수면 아래로 깊이 숨어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태동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의 사모대출 시장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현재 국내 사모대출은 주로 사모펀드(PEF)의 대형 M&A를 지원하는 인수금융 선순위 대출이나 메자닌 투자 정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경영과 자본시장의 최전선에서 실물 경제가 요구하는 자금의 성격은 훨씬 다변화되고 있다. 모험 자본과 전통 대출의 중간 지점에서, 맞춤형 자금을 공급하는 유연한 직접대출(Direct Lending) 채널이 한국 실물경제에 대단히 절실한 이유다.

최근 미국의 사모대출 시장의 불안정성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비유동 자산에 유동성을 덧씌우는 상품 구조부터 경계해야 한다. 사모대출은 장기 자금이다. 이를 개인에게 사실상 수시 환매 가능한 상품처럼 판매하는 순간,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착시의 판매가 된다. 따라서, 한국의 사모대출 시장은 리테일 환매형이 아닌 기관 중심의 폐쇄형 장기자금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수익률 경쟁'이 아닌 '언더라이팅 경쟁'으로 가야 한다. 미국 시장이 흔들리는 배경에는 차입자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재무 약정 완화, 이른바 '커버넌트 라이트(Covenant Light)' 관행의 누적이 있다. 돈이 넘칠 때 대출 기준은 낮아지고, 낮아진 기준은 위기의 씨앗이 된다. 사모대출의 핵심은 높은 금리가 아니라 높은 선별 능력이다.

셋째, 평가와 공시 체계를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 독립적 가치평가, 산업별 익스포저 공시, 이자를 현금 대신 원금에 가산하는 PIK 비중 점검, 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를 제도화해야 한다.

사모대출은 선도 악도 아니다. 위험한 것은 자산이 아니라 구조이고, 더 위험한 것은 구조를 모른 채 높은 금리만 좇는 태도다. 한국은 아직 늦지 않았다. 시장을 키우되 미국의 실수는 닮지 말아야 한다. 높은 수익률은 위험의 대가일 수는 있어도, 불투명성의 대가여서는 안 된다.

반영은 휴맥스해운항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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