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와 휴머노이드 등이 화두가 된 글로벌 산업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함축된 한 장면이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서울 강남에서 치맥 회동을 하고 게임축제 행사장에서 포옹을 하며 마이크를 잡았던 지난해 10월 바로 그 순간이다.
15년만에 다시 서울에 왔다고 한 젠슨 황 CEO는 한국과의 첫 인연으로 1990년대 거의 무명이었던 자신에게 온 어느 기업인의 편지를 소개했다. 그가 편지에는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연결한 한국에서 세계 최초의 비디오게임올림픽을 열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고 하자 옆에 섰던 이재용 회장이 '제 아버지 얘긴데요'라며 발신인은 고 이건희 회장이었다고 확인시켜줬다. 이건희 회장의 제안은 현실화됐고 당시 젠슨 황 CEO이 꾸렸던 기업은 세계 최대의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세계 1위 시가총액 4조4904억 달러(약 6698조원, 3월 기준))이 됐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됐던 지난해 가을에 비해 올해 3월은 미국-이란 전쟁으로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 '지금 그 기업인들이 모였다면 위기에 대한 진단을 털어놓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있다.
지난해 3인 회동을 뒤늦게 떠올리게 된 계기는 지난달 만났던 휴머노이드 생산 기업 CEO와의 만남이었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26)에 참석하고 돌아왔다고 소개한 그는 자신들의 현지 부스에 젠슨 황 CEO의 아들(스펜서 황)이 찾아와 '큰 관심을 가진 듯 이것저것 묻고 갔다'고 했다. 젠슨 황에게 편지를 띄웠던 이건희 회장과, 현재 엔비디아 로보틱스 부문에 역할을 하는 스펜서 황의 열정과 성의를 비교한다면 지나칠까. 더불어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 숱한 역경 속에서 이재용, 정의선 회장 이전 선대 기업인들의 도전과 해법도 궁금해졌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와 드론과 미사일 공포 등으로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며 우리를 비롯해 전세계를 오일쇼크 공포로 밀어넣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자원 무기화와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전세계가 기름값 걱정을 했던 1973 ~ 74년, 1979 ~ 80년 전후처럼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재용 회장의 할아버지인 이병철 선대 회장이 본격적인 반도체 투자를 모색했던 시기는 2차 오일쇼크 시기인 1980년(생전의 인터뷰(1985년 4월27일, 동아일보)와 호암자전 참조)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의 경제부흥계획 입안자(이나바 시즈오 교수)와의 만남과 조언('앞으로 산업은 반도체가 좌우한다, 작고 가벼운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을 통해 투자를 결심했고 치밀한 준비 끝에 1983년 이를 실천에 옮겼다. 물론 1차 오일쇼크 한복판인 1974년 이건희 당시 이사가 사재를 털어 우리나라 1호 반도체 회사 한국반도체를 인수해놓고 '모든 물건에 반도체가 있다'며 아버지를 꾸준히 설득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정의선 회장의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은 한국의 오일쇼크 극복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건설이 뒤늦게 중동에 뛰어든게 1975년이지만 이듬해 '20세기 최대 공사'라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을 수주했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 계열사 전체가 달라붙어 이뤄낸 당시 계약금액 9억3000만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정부예산의 25%에 달하는 금액일 정도여서 중동의 오일달러로 중동발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현대건설은 2010년 아랍에미레이트(UAE) 원자로 건설로 인연을 이어갔고 정부 차원에서 최근 UAE 비축유를 공급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최근 삼성전자는 엔비디아로부터 AI 메모리·파운드리 등의 동맹구축을 제안받았고 현대차는 엔비디아와의 협업으로 차세대 자율주행 솔루션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 외에는 경기개선 기대가 미약한 상황에서 중동발 위기까지 겹쳐졌다. 기업인들에게 더 큰 재량을 줘 시대를 관통해온 기업가정신으로 위기 극복의 키를 잡도록 하면 어떨까. 현대가 벌어들인 오일달러와 삼성의 반도체가 한국경제가 위기를 넘어서 현재에 이르는데 기여한 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