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을 때 해운시장은 전례 없는 격변을 겪었다. 부산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운임은 2000달러에서 2만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팬데믹 이전에 장기 운송계약을 체결했던 선사들은 이 같은 급등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묵묵히 이행했다. 눈앞의 초과 이익을 포기하고 약속을 선택한 것이다.
최근 미국과 이란 간 군사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초대형 유조선 운임이 세 배 이상 상승한 상황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장기 계약을 체결한 선사들은 급등한 보험료와 연료비 일부만을 보전받은 채 기존 운임을 유지하며 원유 수송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이런 모습은 부동산이나 일반 무역 거래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단기간에 급등하면 매도인은 위약금을 감수하고 계약을 파기하려 하고, 수출입 거래에서도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이 변동하면 계약 취소 시도가 빈번하다. 그런데 왜 해운업에서는 이런 일이 상대적으로 드물까.
그 배경에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해운업 특유의 신뢰 문화가 자리한다. 17세기 영국 런던의 로이드 커피하우스에서 선주, 화주, 보험업자들이 구두로 거래를 성사하던 시절 "내 말이 곧 보증(My word is my bond)"이라는 원칙이 업계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서류보다 신용이 앞섰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해운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이름값(Good Name)' 역시 같은 맥락이다. 계약을 어긴 사실은 런던, 싱가포르, 홍콩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고, 한 번 훼손된 평판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일부 중소선사들이 계약을 파기했다가 이후 오랜 기간 화주로부터 외면받은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반대로 HMM은 2010년대 중반 경영위기를 겪으면서도 주요 화주들과 장기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다. 이는 채권단 관리 하에서도 지켜졌던 원칙이었다. 그 결과 2020년 운임 폭등기에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주요 화주들이 HMM을 신뢰하며 물량을 맡겼고 회사는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해운 계약서에 존재하는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조차 쉽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21년 수에즈 운하에서 에버기븐호 좌초로 물류가 마비됐을 때도 다수 선사는 계약 면책을 주장하기보다 아프리카 우회 항로를 택하며 책임을 이행했다. 법적 권리보다 시장의 신뢰를 우선한 결정이었다.
이런 해운업의 관행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단기 차익을 위해 계약을 쉽게 뒤집는 문화는 결국 거래 비용을 높이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반면 해운업은 신뢰를 가장 실용적인 자산으로 인식한다. 시황이 나쁠 때 손실을 감수하고 약속을 지킨 기업이 결국 더 큰 기회를 얻는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선박을 움직이는 힘은 엔진만이 아니다. 수백 년간 축적된 신뢰의 질서가 세계 무역을 지탱해왔다. 해운업이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신뢰는 도덕적 미덕을 넘어, 장기적 경쟁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전략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