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 기름때 묻은 현장이 AI 수출국을 만든다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2026.04.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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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한국의 한 자동차 부품사 대표를 만났다. 30년 업력에 매출 700억원, 현장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CEO(최고경영자)였다. 그런데 정작 고민은 기술이 아니었다. "신입은 안 오고, 숙련공은 은퇴합니다. 일감이 없어서 문 닫는 게 아니라 일할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을 판이에요." 한국 중소 제조업의 현주소다.

AI가 해결책으로 떠오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504개 제조기업을 조사한 결과, 82.3%가 AI(인공지능)를 경영에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중소기업만 떼어 보면 활용률은 4.2%.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서는 94.7%가 '도입 계획조차 없다'고 답했다.

우리가 흔히 '제조업 AX(인공지능 전환)'하면 무인 공장, 로봇 팔, 피지컬 AI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장을 들여다보면 진짜 병목은 라인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에 있다. 견적서, 발주서, 품질 보고서, 원가 계산이 여전히 엑셀과 카톡과 팩스 사이를 떠돌고 있고, 일의 노하우들은 숙련 직원의 머릿속에서만 머문다. 제조 AX의 본질은 라인 자동화가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워크플로우'를 AI로 재설계하는 쪽에 더 가깝다.

실제 사례가 있다. 매출 수백억원 규모의 한 식품 제조업체는 132개 SKU(상품군)를 26개 판매 채널에 깔고 있었다. 채널마다 수수료 구조가 달라 '실제로 얼마가 남는지' 아무도 실시간으로 답하지 못했다. 결산이 끝나야만 이익을 알 수 있었다. 이 업체 대표는 AI 에이전트로 채널별 매출을 자동 수집하고 원부재료·노무비·물류비를 역산해 공헌이익을 매일 계산하는 시스템을 직접 만들었다.

장비를 바꾼 게 아니라 보이지 않던 숫자에 불을 켠 것이다. 이 시스템은 쓸수록 정밀해진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원가 예측이 정확해지고 정확한 견적은 더 많은 수주로 이어진다. 먼저 시작한 곳과 안 한 곳의 격차는 복리처럼 벌어진다.

이런 흐름을 중소 현장으로 퍼뜨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올해 출범한 민간 제조AX 컨소시엄 '엑스모스(AXMOS)'도 이같은 취지에서 출발했다. 여러 기업이 공유하는 AI 플랫폼을 설치하고 전문인력이 현장에 상주하며 맞춤 세팅을 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공정에서 함께 굴러야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데이터가 시스템을 개선하는 학습 고리가 돌아간다. 기술을 파는 게 아니라 '쓸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제조 AX가 왜 절실한지 미국을 보면 감이 온다. 딜로이트와 미국 제조업협회(NAM)에 따르면 미국 제조업은 2033년까지 약 190만 개의 일자리가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미국이 반세기 동안 제조 생태계 자체를 해체해온 결과다. 이걸 다시 쌓으려면 10년으로도 부족하다. 제조업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게 중요한 이유다.

한국의 제조AX는 잠재력도 크다. 미국이 AI의 본진이지만 클라우드 위의 알고리즘과 인프라의 얘기다. 기름때 묻은 제조 현장의 데이터는 우리가 가진 자산이다. 현장 밀착형 소프트웨어에서는 미국의 틈이 보이고, 한국은 그걸 가장 잘 채울 수 있는 나라다.

정부는 올해 AI에만 약 10조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더 중요한 건 예산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다시 보는 눈이다. 반세기 쌓인 현장의 노하우, 대기업-협력사 네트워크, 지방 공장의 숙련된 인력. 너무 익숙해서 안 보일 뿐 전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자산이다.

소수의 선도 기업이 불균형적으로 큰 몫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의사결정이 빠른 오너가 먼저 움직인다면 조용한 지방 공장이 '글로벌 제조 AX의 첫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그 부품사 대표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비싼 인력이 엑셀과 카톡에 쏟는 행정 낭비부터 AI 에이전트에게 맡겨보십시오. 현장 노하우를 AI로 차곡차곡 쌓다 보면, 한국의 부품이 아니라 한국의 '제조 시스템'을 통째로 사가는 바이어가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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