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 반도체 호황,잔인한 양극화로 안가려면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
2026.05.12 02:00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추락하는 원화 가치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금리의 대폭 인상을 요구했다. 시중 금리가 30%에 달했고 국가브랜드는 나빠졌다. 정부는 고강도 기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LG는 반도체를 넘겼고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했다. 세계 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자랑하던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은 날개가 꺾였다.

정리해고가 도입되고 비정규직이 고착화했다. 퇴출과 실업이 만연해 중산층이 설 자리를 잃었다. 그나마 제조업 기반이 강력한 환경에서 환율이 급등하자 경상수지 흑자가 불어났다. 그 덕택에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IMF 체제는 정규직 평생직장이라는 상식을 깨뜨리며 경제 탈동기화(divergence)의 출발점이 되었다. 1990년대 말 인터넷 정보통신 기술이 이끈 닷컴 버블은 한국을 비켜가지 않았다. 인터넷과 기술주에 대한 투자 광풍이 일었고 강남 테헤란로에는 벤처창업 열풍이 불었다.

정부의 지원이 벤처와 바이오 신기술에 집중되자 전통적 제조업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닷컴 주식 투자로 이익을 본 자금이 부동산에 몰려들었다. 3억원 안팎에서 안정되었던 강남 아파트값이 몇 배로 치솟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땅값과 임금 상승에 고전하던 제조업은 중국으로 몰려갔다. 처음에는 섬유산업이 칭다오 등지로 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력산업인 전자와 자동차, 조선도 중국 각지로 진출했다. 한 때 한국 제조업의 상징이었던 수출공단 지역에는 떠나버린 생산기지와 실직의 한숨이 가득했다.

제조업이 중국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하자 경제성장률은 나날이 하락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구직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출생률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과거 생산성 높은 공대에 진학하던 최우수 학생들은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높은 비용과 경쟁력 저하로 고전하던 한국 경제에 최근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수십 년 간 천문학적 자본을 축적한 미 빅테크 기업의 AI 인프라 투자 경쟁으로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메모리 반도체가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 되자 관련 회사의 주가도 급등했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1조 달러를 돌파하고 SK 하이닉스도 뒤를 바짝 추격했다. 두 기업이 45%의 비중을 차지하는 종합주가지수도 7500 포인트를 넘나들고 있다. 아파트에 이어 반도체 주식을 보유한 이와 그렇지 못한 가계 간 부의 격차가 더 커졌다.

문제는 비반도체 산업과 자영업 경기가 바닥을 치는 가운데 AI와 반도체에 집중된 성장패턴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IMF 직후와 중국 특수 당시 존재했던 낙수효과도 제한적이다. 경제 내 잘 나가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 간 괴리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2000년대 초 벤처 창업을 자본시장이 뒷받침하지 못해 소프트웨어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2010년대 중반 가상화폐 열풍을 사장시켜 거대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홍콩자본에 내주었다. 현재 AI, 반도체 호황을 제조업 부활의 호기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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