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에도 대화·타협할 시간이 필요하다[청계광장/이정식]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2026.07.21 02:00

'노봉법' 노동현실과 법원판례 간극 키워
EU·스페인, 사회적대화 거쳐 수용성 높여
갈등 수반할 법일수록 절차적 정당성 중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같은 씨앗이라도 토양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열매를 맺는다. 법도 다르지 않다. 다른 사건에서 옳았던 논리를 맥락도 따지지 않은 채 새로운 문제에 옮겨 심으면, 기대했던 결론 대신 또 다른 갈등을 낳기도 한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쟁과 최근 대법원 판결은 우리에게 바로 이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노동법은 언제나 두 개의 시간 위에 서 있다. 하나는 노동시장의 변화가 밀어붙이는 현실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판례와 원칙이 축적해 온 법의 시간이다. 좋은 입법은 이 두 시간을 연결하지만, 그렇지 못한 입법은 둘 사이의 간극을 오히려 키운다.

노란봉투법의 출발은 분명했다. 불법파업을 둘러싼 과도한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노동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떠안는 현실을 개선하고, 복잡해진 간접고용 구조에 맞게 노동법을 현실화하자는 문제의식이었다. 그 방향성 자체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입법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두 질문이 하나의 답으로 성급하게 연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 질문은 "원청이 하청노조를 방해하거나 탄압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2010년 현대중공업 사건에서 원청이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한다면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른바 '실질적 지배력' 법리다. 두 번째 질문은 "원청은 하청노조와 단체교섭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1986년부터 일관되게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원청에게는 교섭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왔다.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도 개정 전 법률이 적용되는 사건에서는 이 원칙을 다시금 확인했다.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교섭에 나서라는 '적극적 의무'다. 전자는 권리 침해를 금지하는 문제이고, 후자는 새로운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문제다. 노란봉투법 논쟁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충분히 구분되지 못했다. 대법원이 개정 전 사건에 대해 기존 법리를 유지한 것은 노란봉투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행위 당시의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을 확인한 결과다.

이번 논란이 남긴 교훈은 법안의 찬반을 넘어선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입법의 방식이다. 입법은 사회적 요구를 법 조문으로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아니다. 새로운 현실과 기존 법체계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서로 다른 법리가 어떤 맥락에서 형성됐는지를 끝까지 검증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첨예한 갈등을 수반하는 노동 입법일수록 대화와 합의라는 '절차적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최근 유럽연합(EU)과 스페인의 입법사례는 우리에게 좋은 이정표를 제시한다. 사회적 대화와 정치적 타협을 거친 입법을 통해 수용성ㆍ타당성ㆍ안정성 등 법적 정당성을 높혔다.

앞으로도 플랫폼 노동, 인공지능(AI) 확산, 정년연장처럼 기존 법체계가 경험하지 못한 과제들이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이미 확립된 법리와 아직 형성 중인 법리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필요가 크더라도 적용 범위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셋째, 입법의 역할과 사법의 역할이 충돌이 아닌 보완 관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입법은 시대를 앞서갈 수 있다. 그러나 앞서간다는 것은 기존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한지를 이해관계자들에게 더 치밀하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다. 그래야 법은 사회적 신뢰를 얻고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다.

노동시장은 계속 변할 것이고 법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곧 좋은 입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법의 생명은 속도에 있지 않다. 현실의 시간과 법의 시간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정합성, 그리고 그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대화의 성숙함에 있다. 그것이 노란봉투법 논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값진 교훈이다.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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