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산업지형을 뒤흔드는 핵심 화두는 단연 AI(인공지능) 기술선점 경쟁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엔비디아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빅테크들은 미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혁신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벤처투자와 M&A(인수·합병)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치열한 경쟁의 최전선에서 첨병역할을 하는 것이 CVC(기업형 벤처캐피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벤처투자금액 3394억달러 가운데 CVC의 비중이 57%(1967억달러)에 달했다. 특히 전체 AI·머신러닝(ML) 벤처투자액에선 CVC 비중이 68%나 됐다. 엔비디아의 '엔벤처스'와 구글의 '구글벤처스' '그레디언트벤처스' 등 글로벌 빅테크 CVC들은 유망기술을 보유한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고 이후 전략적 협업이나 M&A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CVC들이 AI를 비롯한 딥테크 시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지만 국내는 사정이 딴판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대기업(일반지주회사) CVC는 13개사에 불과하다. 이들 CVC의 지난해 벤처투자 규모는 1939억원으로 전체의 1%에 그쳤다. 이마저도 전년(2451억원)보다 줄었다. 제도가 도입되고 첫 조사를 시작한 2022년과 비교해도 CVC 수나 투자규모 모두 유의미한 변화가 없다.
국내 대기업 CVC가 정체된 이유는 명확하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CVC는 펀드를 조성할 때 외부자금을 40%까지만 조달가능하고 펀드 총액의 20%를 초과해 해외에 투자할 수도 없다. 돈을 모으는 펀딩단계부터 한계가 뚜렷한 데다 글로벌 혁신 스타트업 투자마저 법으로 제한한 셈이다.
모험자본은 본래 위험을 감수하며 혁신 가능성에 투자하는 자금이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 CVC는 시장의 위험보다 규제의 장벽을 먼저 넘어야 한다. 자금조달도, 투자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CVC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제도 도입 당시에도 규제로 인해 대기업 CVC가 벤처투자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그룹의 전략적 첨병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정부는 44년 된 금산분리 원칙을 앞세워 족쇄부터 채웠다.
여기에 정부가 추진하는 중복상장 규제까지 시행되면 대기업 CVC의 벤처투자와 M&A는 더욱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 CVC가 지분을 20% 이상 보유한 투자기업이나 규모는 작지만 예상 기업가치가 높은 딥테크 기업은 저비중 자회사(자산과 매출, 영업이익이 모두 모회사의 10% 미만인 자회사)라도 규제대상이 될 수 있어서다. 벤처업계에선 이 같은 규제가 창업생태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벤처확인기업 등을 위한 별도 심사체계 마련을 촉구하고 나선 상태다.
정부는 'AI 3대강국 도약' '우주 5대강국 도약' '벤처 4대강국 도약'이란 원대한 정책목표를 내세운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이 걸린 패러다임 전환기에 정부 재정이나 관 주도의 정책금융만으론 한계가 명확하다. 민간자본, 특히 풍부한 유동성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대기업의 '모험자본'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전향적이고 과감한 규제혁신에 나서야 할 때다. 자금조달이나 투자제한은 과감히 풀되 거래단위별로 시장경쟁 제한여부 등을 심사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모험자본은 모험할 수 있을 때 혁신을 만든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모험자본이 마음껏 모험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